우크라이나군 병사들이 지난달 8일 도네츠크 전선에서 러시아군 진영을 향해 박격포를 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한국 정부가 겉으론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지만, 미국을 통해 ‘우회 지원’한 포탄 규모가 유럽 전체의 지원 물량을 합친 것보다 많다는 미국 언론 보도가 나왔다. 러시아에 큰 안보상의 위협을 가한 한국 정부의 선택에 분노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9월 북-러 정상회담에 나서며 양국 간 ‘전략적 협력’을 강화했다는 설명이 더 설득력을 얻게 됐다.
워싱턴포스트는 4일(현지시각) 지난해 2월 말 이후 1년10개월째 이어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전쟁 상황을 점검하는 심층 기사에서 어떤 방식이었든 “한국은 궁극적으로 모든 유럽 국가들을 합친 것보다 많은 포탄을 우크라이나에 공급했다”고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전쟁이 장기화하며 우크라이나군이 필요로 하는 교육·무기·탄약을 제때 지원하는 일이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의 주요 과제로 떠올랐다. 이를 논의하기 위해 올해 2월3일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주재로 열린 회의에서 논의된 주요 안건은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데 꼭 필요한 155㎜ 포탄이었다. 백악관은 우크라이나군이 군사적 목적을 달성하려면 월 9만발 이상의 포탄이 필요하다고 계산했지만, 미국이 증산을 해도 필요량의 10분의 1 정도만 공급할 수 있었다.
설리번 보좌관 등이 내린 결론은 ‘한국에 도움을 구한다’는 것이었다. 미국 국방부의 계산에 따르면 한국은 마음만 먹는다면 자신들이 보유한 155㎜ 포탄 33만발을 41일 안에 우크라이나에 공급할 수 있었다. 걸림돌은 전쟁 지역에 살상무기 공급을 제한하는 한국 ‘규정’(‘전략물자 수출입고시’ 등)이었다. 신문은 한국 정부는 직접 우크라이나에 포탄을 공급하지 않는 ‘간접적 방식’이라면 미국의 제안을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고 전했다. 다만, 한국이 보낸 포탄이 우크라이나에 직접 제공됐는지, 미국을 거쳐 갔는지, 미국이 자국 보유분을 우크라이나에 보내고 한국이 제공한 것으로 재고를 채웠는지 등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한국이 무기 지원 가능성을 직접 언급한 것은 미국 국빈방문을 앞둔 윤석열 대통령의 4월19일 로이터 통신 인터뷰를 통해서였다. 그러자 러시아 외교부는 이튿날 이를 “적대 행위로 간주하겠다”며 “한반도에 대한 우리 접근법에 영향을 줄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러시아는 이후 9월 정상회담에서 북한에 위성 발사 기술을 전수할 수 있다는 의향을 밝히는 등 전략적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국방부는 보도에 대해 명확한 답변을 꺼렸다. 전하규 국방부 대변인은 5일 정례 기자회견에서 ‘살상무기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정부 방침에 변화가 있느냐는 질문에 “군은 우크라이나의 자유 수호를 위해 인도적 지원과 군수물자 지원을 해왔다. 이런 정부 입장에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우크라이나에 방독면 등 비살상 군수물자 지원을 했지만, 총포나 포탄 같은 살상무기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공식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논란의 핵심인 우회·간접 지원 여부에 대해선 “간접 지원의 정확한 의미가 뭔지는 말씀드리기 어렵다”며 즉답을 피했다.
한국 방산업계 등에서는 한국이 미국에 155㎜ 포탄 50만발을 대여하고 미국은 우크라이나 지원으로 부족해진 포탄 비축분을 이렇게 빌린 포탄으로 채워 넣고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또 국내 방산업계는 이와 별도로 지난해 ‘최종 사용자를 미국으로 한다’는 조건으로 155㎜ 포탄 10만발을 수출한 바 있다.
워싱턴/이본영 특파원, 권혁철 기자
ebo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