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과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 EPA 연합뉴스
경찰의 폭력과 인종차별에 항의하는 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할 수 있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방침에 마크 에스퍼 국방장관이 반기를 들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즉시 에스퍼 장관을 ‘진압’했으나, 국방부 안팎은 부글부글하고 있다.
에스퍼 장관은 3일(현지시각) 국방부에서 기자회견을 자청해 “법 집행에 병력을 동원하는 선택지는 마지막 수단으로만, 가장 위급하고 심각한 상황에서만 사용돼야 한다”며 “우리는 지금 그런 상황에 있지 않다. 나는 반란법(폭동진압법) 발동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일 반란 진압 등을 위해 대통령이 군대를 투입할 수 있도록 한 반란법을 발동할 수 있음을 내비친 바 있다. ‘트럼프 예스맨’으로 꼽혀온 에스퍼 장관이 공개적으로 반대 목소리를 낸 것이다.
이에 트럼프는 백악관에서 에스퍼를 맹비난했다고 <뉴욕 타임스>가 한 관리를 인용해 보도했다. 에스퍼는 워싱턴 인근에 배치한 현역 병력 중 약 200명을 노스캐롤라이나주의 기지로 복귀시키라고 명령한 상태였으나, 트럼프의 지시로 이 방침을 번복했다. 미 언론은 안 그래도 백악관이 답답하게 여겨온 에스퍼의 거취가 더 위태로워졌다고 짚었다.
미국 워싱턴 백악관 근처에서 3일(현지시각) 흑인 조지 플로이드의 사망에 항의하는 수많은 시민들이 휴대전화 전등 시위를 하고 있다. 전투헬기 ‘블랙호크’가 출현하는 등 전장을 방불케 했던 전날과 달리 이날 시위는 대체로 평화적으로 진행됐다. 워싱턴/로이터 연합뉴스
마크 밀리 합참의장도 트럼프의 시위 대응에 에둘러 반대를 표시했다. 그는 이날 군 지휘관들에게 “모든 군인은 미국인들에게 표현의 자유와 평화로운 집회 권리를 부여한 헌법을 지킨다고 선서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메시지를 보냈다.
군 책임자들이 이렇게 나선 것은 군대 동원 방침에 반대 여론이 높은데다, 자신들에게 ‘트럼프 떠받들기에 급급하다’는 비판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특히 에스퍼 장관과 밀리 합참의장이 이틀 전 트럼프의 세인트 존 교회 앞 사진촬영에 동참한 것이 결정타였다. 트럼프의 ‘인증샷’을 위해 평화시위대를 최루탄으로 내쫓는 데 동조한 것으로 비친 탓이다. 에스퍼는 기자들에게 교회에 가는 것은 알았지만 사진촬영이 있을 줄은 몰랐다고 해명했다.
트럼프 행정부 초대 국방장관인 제임스 매티스는 3일 시사잡지 <애틀랜틱> 기고를 통해 “도널드 트럼프는 미국인들을 통합하려 노력하지 않는 내 생애 첫 대통령이다. 그는 심지어 통합하려 노력하는 척도 안 한다”며 “그는 우리를 분열시키려 한다”고 비판했다.
매티스는 최근 에스퍼가 “우리는 전투공간에서 제압할 필요가 있다”고 한 발언을 겨냥해, “우리의 도시들을 군복 입은 군대가 ‘제압’하러 들어오는 ‘전투공간’으로 보는 생각을 거부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날에는 제임스 밀러 전 국방부 정책차관이 ‘트럼프 교회 인증샷 촬영’에 동행한 에스퍼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국방과학연구위원회 위원직에서 물러났다. 에스퍼는 기자들에게 “나는 국방부가 정치에서 떨어지도록 매우 노력하고 있는데 대선이 다가오면서 매우 힘든 일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시위 과정에서 1만명 이상이 경찰에 체포된 것으로 집계됐다. <에이피>(AP) 통신 보도를 보면, 로스앤젤레스가 2500여명으로 가장 많고, 뉴욕이 2천여명으로 다음이다.
워싱턴/황준범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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