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시민들이 지난 5월24일 홍콩 시내에서 중국의 ‘홍콩 보안법’ 제정 추진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홍콩/로이터 연합뉴스
시민의식과 비판적 사고능력을 가르치는 홍콩 고등학교 인문학(통식교육) 교과서에서 ‘삼권분립’ 개념이 사라졌다. 교육당국의 ‘자문’ 결과를 교과서를 발행하는 출판사 쪽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여 교과서를 개정한 결과다.
9월 학기부터 홍콩의 각급 고교에서 사용할 인문학 교과서 개정판은 기존 교과서에 포함됐던 내용 상당 부분이 삭제되거나 변경됐다고 19일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가 보도했다. 인문학 교과서를 펴내는 6개 출판사는 지난 17일 각급 학교 교사들에게 이러한 교과서 변경 내용을 통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신문이 전한 개정 내용을 보면, <오늘의 홍콩> 교과서에선 행정·입법·사법부가 독립적으로 견제와 균형을 이루는 정치 체제를 뜻하는 ‘삼권분립’이란 표현이 빠졌다. 친중파 진영에선 홍콩 기본법이 ‘행정부 주도’로 통치 체제를 규정하고 있다는 점을 근거로 입법·사법부 독립 개념을 문제 삼아왔는데, 결국 교과서에서 이 표현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홍콩 시민의 ‘정체성’과 관련된 부분에도 변화가 있다. 시위대가 ‘나는 홍콩인이다’ 등의 구호가 적힌 손팻말을 들고 있는 장면을 담은 그림이 실렸던 이전 교과서와 달리 개정판에선 다른 그림으로 교체됐다. 홍콩 보안법 시행 이후 지난해 범죄인 인도 조례(송환법) 반대 시위대의 으뜸 구호였던 ‘광복홍콩, 시대혁명’ 구호가 불법으로 규정된 현실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시민 불복종’을 설명하는 부분에선 불복종 운동에 참여하게 되면 추후에 형사처벌을 포함한 법적 책임을 지게 된다는 부분이 강조됐다. <현대 중국> 교과서에선 “중국에선 아직까지 법치가 제대로 안착되지 않았다”고 비판하는 내용이 아예 삭제됐다.
2009년 도입돼 홍콩 대학입시의 필수과목으로 지정된 인문학 과목은 △독립적·비판적 사고능력 향상 △시민의식 고양 △사회적 의제에 대한 이해도 증진 등을 목적으로 한다. 인문학 교과서는 공중보건, 현대 중국, 세계화, 오늘의 홍콩 등 6개 분야로 나눠져 있으며, 중국어나 영어 과목과 달리 교육당국의 심의 절차 없이 학교별로 각 출판사가 펴낸 교재를 선택해 사용할 수 있다.
홍콩 친중파 진영과 중국 당국은 그간 인문학 과목을 집중적으로 비판해왔다. 특히 송환법 반대 시위가 불을 뿜었던 지난해 중국 관영매체들은 앞다퉈 “급진적 교사와 편향된 교과서가 편견에 사로잡힌 홍콩 청소년의 시위 참여를 부추기고 있다”며 “홍콩에서도 ‘애국교육’을 포함한 중국 본토의 교육과정을 따라야 한다”는 주장을 쏟아낸 바 있다. 홍콩 정부가 ‘자문기구’를 설치하고, 인문학 교과서에 대한 사실상의 ‘검열’에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교육당국 쪽은 “교과과정의 목표에 따른 자문을 해줬을 뿐 이를 따를지 여부는 출판사 쪽이 자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반면 홍콩통식교육교사연합회는 18일 성명을 내어 “논쟁적인 주제에 대해 학생들과 토론하기가 대단히 어려워졌다”며 “교육당국은 10년 이상 유지돼온 교과서 내용을 바꾼 기준이 무엇인지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베이징/정인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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