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5일 즉위 70주년 축하 행사 뒤 영국 런던의 버킹엄 궁전에서 군중들에게 손을 흔들고 있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런던/AFP 연합뉴스
8일(현지시각) 숨을 거둔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은 2022년 2월6일 즉위 70주년을 넘기는 등 영국 역사상 가장 오랜 기간 재임하며, 영국이 ‘대영제국 이후 시대’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영욕을 함께 한 군주다. 영국 군주는 1688년 명예혁명 이후 정치적 권한을 의회에 넘겨주고 상징적인 존재로 남았지만, 여왕은 이런 한계 속에서도 영향력과 존재감을 한껏 발휘했다. 국가 통합의 상징적 존재라는 역할과 대중의 주목을 받는 ‘유명 인사’로서의 역할을 동시에 만족시켜, 군주제 존속을 반대하는 여론을 무마하면서 영향력을 극대화한 ‘지극히 현대적인’ 인물이었다.
1926년 4월21일 런던에서 태어난 엘리자베스 알렉산드라 메리 여왕은 1952년 2월6일 아버지 조지 6세 사망 이후 2022년 9월까지 70년 넘게 영국 국왕으로 재임했다. 재임 기간은 자신의 고조모인 빅토리아 여왕(1837~1901년 재임)의 기존 최고 재임 기간인 64년보다 6년 이상 길다. 그는 ‘연합왕국’(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의 군주일 뿐 아니라 캐나다·오스트레일리아 등 14개국을 더한 영국 연방 왕국의 군주이기도 했다. 비록 상징적인 자리지만, 20세기 중반 이후 전세계에서 2개 이상의 주권 국가를 대표한 유일한 군주다.
그가 즉위한 1952년은 영국이 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했으나 국제 질서의 주도권을 미국에 넘어간 뒤였다. 영국이 제국의 지위를 완전히 잃은 뒤 즉위한 여왕은 68년 뒤인 2020년 1월에는 자신의 나라가 유럽연합(EU)을 공식 탈퇴함으로써 유럽 내 주도권을 프랑스와 독일에게 넘겨주는 것까지 지켜봐야 했다. 그의 재임 기간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 제국을 이끈 빅토리아 여왕 시기와는 비교조차 어려울 만큼 영국의 위상이 약해진 시기였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조지 5세 왕의 둘째 아들인 요크 공작(이후 조지 6세가 됨)의 맏딸로 태어났기 때문에 왕좌에 오를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하지만 1936년 큰아버지인 에드워드 8세가 미국 출신 이혼 여성 윌리스 심슨과 결혼하기 위해 즉위 11개월 만에 왕위를 동생에게 물려줌으로써, 곧바로 왕위 계승 1순위 후보로 떠올랐다.
영국이 독일과 사투를 벌인 2차 세계대전 기간, 엘리자베스 여왕은 자신의 여동생 마거릿 로즈 공주와 함께 런던을 떠나 스코틀랜드와 런던 서쪽 윈저궁에서 주로 지냈다. 하지만 전쟁 막바지인 1945년 2월에는 전쟁에 직접 참가하고 싶다고 아버지를 설득해, 19살의 나이에 여군에 입대했고 보급·수송 관련 장교로 활동했다.
2022년 9월 6일 스코틀랜드 밸모랄 성에서 리즈 트러스 신임 보수당 대표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밸러터/로이터 연합뉴스
전쟁이 끝난 지 2년 뒤인 1947년 11월에는 그리스와 덴마크의 왕자인 필립 마운트배튼과 결혼해 이듬해 11월 찰스 왕자를 낳았다. 1951년 여름 아버지인 조지 6세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엘리자베스는 그를 대신해 공식 행사 등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그해 10월엔 캐나다와 미국 방문 등 해외 순방에도 나섰다. 이듬해 2월 조지 6세가 사망하면서 즉위한 엘리자베스 여왕은 3달 동안 추모 기간을 거친 뒤 거처를 버킹엄 궁전으로 옮기면서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여왕은 1961년 영국 군주로서는 50여년 만에 처음으로 인도를 방문했으며 1968년 남아프리카공화국, 1979년 중동 순방 등을 통해 과거 식민지였던 지역과의 관계 강화에 힘을 기울였다.
1970년대 이후엔 대중이 현대의 군주에게 기대하는 바를 충족시켜주는 데도 적극 나섰다. 1970년 왕족의 생활을 텔레비전 방송을 통해 공개한 것이 이런 변화 움직임을 상징한다. 또 이혼을 금기시하는 왕족의 전통에서 탈피해 시대 변화를 수용하는 모습도 보였다. 1978년 자신의 여동생인 마거릿 로즈 공주(스노든 백작 부인)의 이혼을 허용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의 이혼은 1901년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인 빅토리아 멜리타 공주의 이혼 이후 첫 왕족의 이혼이었다.
1992년에는 왕위 계승 서열 1위인 아들 찰스 왕세자와 다이애나 왕세자빈(웨일스 공작부인)의 별거도 허용했다. 두 사람은 별거 4년 뒤인 1996년 8월28일 이혼했으며, 다이애나는 그로부터 1년 뒤인 1997년 8월31일 프랑스 파리에서 교통사고로 숨졌다. 그녀의 비극적인 사망으로 영국 왕족에 대한 비판 여론이 거세지기도 했다. 하지만 2000년 대 이후 영국 왕실은 다시 영국 대중들로부터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2011년 찰스 왕세자의 맏아들인 윌리엄 왕자(케임브리지 공작)의 결혼, 2012년 엘리자베스 여왕 즉위 60년 행사 등 주요 행사가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2020년 2월 찰스 왕세자의 둘째 아들인 해리 왕자(서식스 공작)가 왕실 ‘고위 구성원’의 임무를 내려놓고 왕가를 떠나면서 왕족 내부 문제는 또 한차례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해리 왕자는 2018년 미국 배우 메건 마클과 결혼했다. 메건은 이혼 경력이 있으며, 흑백 혼혈인 최초로 영국 왕족 구성원이 됐다. 순탄한 듯 하던 해리 왕자 부부의 생활은 왕족의 일거수 일투족을 추적하는 영국 언론들이 메건에 대한 공격적인 보도를 이어가면서 어려워졌다. 결국 왕자 부부는 왕실을 떠나는 결단을 내렸다. 해리 왕자 부부는 왕실을 떠난 지 1년 만인 2021년 2월19일 왕실에 영원히 복귀하기 않기로 함으로써 왕족과 완전히 결별했다. 이 결정에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뜻이 상당히 반영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부터 2달여 뒤인 4월9일에는 73년 이상 동안 자신의 곁을 지키던 남편 필립공을 먼저 떠나보내는 슬픔을 겪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개인적으로 단순한 생활을 즐기며, 의례적인 행사 외에 정부 업무에도 상당히 관심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 영국 의회 개회사 등을 통해 적절한 선에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드러내면서 국가 운영에 나름의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민주주의 아래서 선거로 뽑힌 권력이 아니라는 근본적인 한계를 대중의 선망과 지지를 무기 삼아 돌파한 ‘대중의 군주’로 역사에 기록될 전망이다.
1976년 7월 7일 미국을 방문해 제럴드 포드 미 대통령을 만나고 있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워싱턴/CNP 연합뉴스
신기섭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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