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주가는 올 1월부터 2만5천~2만7천을 오가며 완만하게 상승세를 보이다가 4월 말부터 급격히 오르기 시작했다. 지난달 17일 3만을 훌쩍 뛰어넘더니, 이달 13일 3만3천을 넘어 연일 기록을 갈아치우는 중이다. EPA 연합뉴스
“30년 만에 처음으로 높은 수준의 임금 인상이 실현되면서 기업 부문의 투자 의욕이 조성되고 있다. 30년간 이어진 디플레이션 경제의 악순환을 끊으려는 도전이 확실히 시작됐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지난 13일 아동수당 확대를 핵심 내용으로 한 ‘어린이 미래전략 방침’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에서 일본 경제의 흐름이 바뀌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올해 최저임금 전국 평균 1천엔(약 9050원) 달성을 포함해 최저임금위원회가 제대로 논의를 해달라”며 임금 인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강조했다.
이날은 일본 주식시장에도 의미 있는 날이었다. 일본 증시의 대표 주가지수인 닛케이225 평균 주가가 33년 만에 종가 기준으로 3만3천 선을 넘어선 것이다. 닛케이지수는 3거래일 연속 상승하며 전장 대비 584.65(1.8%) 오른 3만3018.65에 장을 마쳤다. 장중엔 3만3127.36을 찍기도 했다. 닛케이지수가 심리적 마지노선인 3만3천 선을 넘긴 것은 ‘거품경제’ 시기인 1990년 7월 이후 처음이다.
일본 닛케이225 평균 주가는 올 1월 2만5천~2만7천을 오가며 완만하게 상승세를 보이다가 4월 말부터 급격히 오르기 시작했다. 지난달 17일엔 3만을 훌쩍 뛰어넘더니, 이달 13일 3만3천을 넘어 연일 최고 기록을 갈아치우는 중이다.
거품경제 붕괴 이후 ‘잃어버린 30년’이라 불리는 장기 디플레이션에 신음해온 일본 경제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시장에선 두 사람의 이름이 ‘좋은 신호’로 거론된다. 임금 인상을 이끌고 있는 기시다 총리와 일본 기업의 주식을 대거 사들인 ‘투자의 신’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이다.
니시하라 리에 제이피(JP)모건증권 수석애널리스트는 <니혼게이자이신문>에 증시 급상승과 관련해 “일본에선 임금 상승과 고물가의 선순환이 이뤄지고 있다. 일본이 바뀌고 있는 시점에서 버핏 회장이 일본을 방문해 일본 주식에 대한 추가 투자 가능성을 얘기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현재 일본 주가 급등을 이끄는 일등 공신은 해외 투자자들이다. 일본 재무성 자료를 보면, 외국인 투자자들이 4월부터 5월 말까지 9주 동안 7조4천억엔(약 67조원)의 주식을 사들였다. 일본 주식 매매 대금 중 해외 투자자 비율은 2013년 58.1%에서 이달 초순 69.4%까지 증가했다.
‘버핏 효과’가 한몫을 톡톡히 했다. 버핏 회장은 지난 4월 일본을 방문해 “일본 종합상사들에 대한 투자가 미국 이외 기업 중 가장 많다. 지분 보유를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며 “추가 투자를 검토하고 싶다”고 밝혔다. 버핏 회장은 2020년 8월 이토추상사·미쓰비시상사·마루베니·미쓰이물산·스미토모상사 등 일본 5대 종합상사 지분을 5% 이상 보유했고, 지난해 11월 6%, 최근 보유 지분율을 7.4%까지 늘렸다. 지난해 일본 5대 종합상사는 최고 실적을 거뒀다. 버핏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특히 버핏 회장은 올해 1분기 세계 최대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업체인 티에스엠시(TSMC) 지분을 처분한 것과 관련해 “대만을 둘러싼 지정학적 분쟁이 고려 사항이었다”며 미-중 대립이라는 국제 정세까지 반영해 “대만보다 일본이 좋은 투자처”라고 강조했다. 버핏 덕택에 일본 증시를 재평가하는 해외 투자자들이 급증했고, 일본에선 이들을 ‘미니 버핏’이라고 부른다.
‘투자의 신’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 연합뉴스
지난 4월9일 취임한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신임 총재가 대규모 금융 완화 정책을 유지하겠다고 밝히는 등 계속되는 엔화 약세(엔저) 흐름도 증시를 끌어올리는 주요 배경이다. 달러를 자금으로 활용하는 해외 투자자들에겐 뉴욕의 비즈니스호텔 수준의 요금으로, 도쿄의 일류 호텔에 묵을 수 있는 상황이나 마찬가지다. 저금리로 저렴하게 투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코로나19 대유행이 끝나고 정상적인 경제활동이 다시 재개되면서 외국인 방문객이 늘고, 일본 기업 실적이 좋아진 것도 영향을 줬다. 4월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은 194만9100명으로 지난해 10월 개인 여행이 가능해진 이후 가장 많았다. 코로나 이전인 2019년 4월의 66.6%에 이르는 등 어느 정도 회복했다. 자동차·반도체·종합상사 등을 중심으로 일본 상장사들은 지난해 최고 이익을 기록했다. 일본 시총 1위 도요타자동차는 엔화 약세와 해외 판매 호조에 힘입어 ‘2022년 4월~2023년 3월’ 매출이 전년 대비 18% 이상 늘어 사상 최고 수준이다. 그 밖에 일본 상장사들의 주가순자산비율(PBR) 개선 등 주주 친화 정책 확산, 미-중 대립으로 투자자들이 중국에서 지정학적 위험이 덜한 일본으로 관심을 돌리고 있는 것 등이 겹쳐 일본 증시에 ‘순풍’으로 작용했다.
일본 주가가 급상승하면서 시장에선 일본 경제가 이제 장기 침체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다. 아베 신조 전 총리 시절이던 2013년 4월부터 대규모 양적 완화 정책인 ‘아베노믹스’를 꾸준히 추진해왔는데도 물가와 임금이 오르지 않던 흐름이 깨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가장 반가운 청신호는 임금 인상이다. 일본의 최대 노동조합인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연합)가 지난 1일 발표한 자료를 보면, 올해 봄 임금협상에서 임금이 3.66%나 올랐다. 30년 만에 가장 높은 수준이다. 우에다 일본은행 총재도 지난 16일 기자회견에서 “다른 회사가 (임금을) 올리니까 올린다. (인력 부족으로) 노동자를 채용하기 힘드니 임금을 인상한다”며 기업의 임금 인상 확산 분위기를 전했다.
다만 최근 임금 인상 흐름은 경제 활성화의 결과라기보다 물가 상승이 견인한 측면이 강하다. 원자재 가격 상승과 기록적인 엔화 약세로 지난 20여년 동안 물가 변동이 거의 없던 일본에서도 지난해부터 물가가 오르기 시작했다. 소비자물가(신선식품 제외) 상승률은 지난해 4월 2%대에 진입하더니 9월 3%, 12월 4%, 올 1월 4.2%로 최고점을 찍었다. 30~40년 만에 높은 물가 상승이다. 2~3월 3.1%, 4월 3.4%로 둔화되긴 했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물가를 잡기 위해서는 금리를 올려야 하는데, 일본 국내총생산(GDP)의 약 256%를 차지하는 국가 부채 등의 영향으로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더 깊은 수렁에 빠질 것을 우려한 일본의 노사정은 ‘물가 상승→임금 인상→소비·투자 확대→경제 활성화’라는 선순환을 만들기 위해 하나로 힘을 모았다. 기시다 총리와 도쿠라 마사카즈 경제단체연합회(경단련) 회장이 ‘친노동 정책’에 총대를 멨다.
이런 노력 덕택에 경제지표도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 일본의 1분기(1~3월) 실질 국내총생산이 전 분기 대비 0.7% 증가했다. 시장 예상을 뛰어넘는 수치로 한국 성장률(0.3%)을 2배 이상 앞질렀다. 연간으로 환산하면 2.7%다. 기업의 설비투자와 개인소비도 각각 1.4%, 0.5% 증가했다.
아직 임금 인상이 물가 상승세를 따라잡지 못하면서 실질임금은 13개월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지만 올 하반기부터 조금씩 나아질 전망이다. 임금협상 영향이 여름께부터 급여에 반영되고, 물가상승률도 둔화 흐름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노사정은 임금 인상 분위기를 내년에도 이어갈 방침이다. 도쿠라 경단련 회장은 최근 기자회견에서 “물가를 뛰어넘는 임금 인상은 기업의 사회적 책무다.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일본 경제가 뚜렷한 변곡점을 맞이하긴 했지만, 계속 승승장구할 수 있을지 좀 더 지켜봐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하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저출산·고령화에 따른 인구 감소, 낮은 생산성, 미흡한 인적 투자 등 일본 경제의 고질적인 문제는 여전하다. 일본 경제가 살아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는 각오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쿄/김소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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