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승근 정치에디터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지난 12일 대선 예비후보 등록을 마쳤다. 야권 주자 가운데 가장 동작이 빨랐다. 지난달 29일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했을 때 야권이 그를 중심으로 급속히 재편될 것이라 전망한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파괴력은 예상보다 약했다. 컨벤션 효과도 누리지 못했다. 윤 전 총장의 부족함 때문이다.
검찰총장 사퇴 뒤 ‘비대면 전언 정치’로 비판받던 그는 활발한 대면 접촉에 나섰다. 그런데 ‘식사 정치’가 중심이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원희룡 제주지사…. 그러나 결과물은 공허하다. 7일 안철수 대표와의 만남 뒤엔 “정권교체를 위해 야권의 지평을 중도로 확장하고 이념과 진영을 넘어 실용정치시대를 열어가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고 밝혔다. 이런 식이다. 말의 상찬 속에 원론만 나열한다. 상대가 경쟁자나 국민의힘 입당을 촉구하는 이들인데, 윤 전 총장 스스로 ‘반문재인 깃발’ 말고는 정치적 행선지를 정하지 못한 탓에 또렷한 결론이 있을 수 없다. ‘식사 정치’의 속성상 ‘구태·밀실 정치’ 냄새가 짙게 풍겨 후한 점수를 받기도 어렵다.
입당보다 중요하다던 민심탐방 역시 헛도는 느낌이다. 윤 전 총장은 대부분 민심탐방을 ‘반문 정치’의 소재로 활용·소모한다. 지난 2주 동안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부동산·대북 정책에 비판적인 이들을 집중 탐방했다.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대전 카이스트 원자력공학 전공생들과의 만남이 대표적이다. 월성원전 수사 때문에 정권과 불화하다 정치에 발을 들였다는 얘기를 강조했지만 ‘방역수칙 위반’ 논란과 ‘탄소 중심’ 마스크로 더 깊은 인상을 남겼다. 11일엔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김헌동 부동산건설개혁본부장과 정책 대담을 하고, 13일엔 한국공인중개사협회 도봉구지회장을 만나 현장 목소리도 들었다. 그리고 인상비평 수준의 말만 반복했다. “시장과 싸우는 정책뿐이다.” “현장에서 들어보니 전세난도 심각하고, 임대차 3법 때문에 서민이 받는 고통이 너무 크다.” ‘족집게 과외’에도 여전히 준비가 부족하다는 걸 인증한 셈이다.
메시지도 신박하지 않다. 대전을 찾아 “충청대망론이라는 건 충청 출신 대통령이 된 분이 없기 때문에 (나오는) 지역민의 정서”라고 했다. 1995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꺼내 든 ‘충청도 핫바지론’을 되살린 느낌이다. 중도 확장을 외치지만 행보는 보수 집중이다. 천안함 생존자와 유족, 서해 피살 공무원의 유족 등을 만나 안보를 강조한다. 국가를 지킨 이를 예우하고, 국가가 국민을 지켜야 한다는 데 시비 걸 이는 없다. 문제는 남북관계를 풀 혜안은 없고, ‘보수본색’만 또렷해진다는 점이다. 중도는 날 선 ‘반문 기치’와 모호한 말 몇마디로 줍줍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검찰총장으로 문재인 정부의 간섭과 압력에 맞서 공정과 상식을 지키려다 탄압받았고, 국민의 부름을 받아 정치적 야심이 1%도 없던 자신이 대선 출마를 결행했다는 게 윤 전 총장이 풀어내는 서사의 기본 구조다. 야당 지지층의 반문 정서, 유권자의 정권교체 심리가 그에게 투영돼 야권 주자 1위를 달리고 있다. 대선으로 직행한 검찰총장에 대한 비판, 그가 벌인 수사의 공정성 등에 대한 의문을 모르쇠할 수 있는 명분인 ‘국민 부름’의 근거도 “국민이 계속 나를 지지하고 성원”한 것, 곧 지지율이다. 허술한 명분 위에 발을 딛고 서 있는 셈인데, 정작 윤 전 총장은 국민의힘 경선을 피한 뒤 대선이 임박해 여론조사로 야권 단일후보가 되겠다는 구상을 하는 듯하다.
그의 구상이 현실이 될지, 허망한 꿈으로 끝날지 알 수 없다. 다만 허점이 이미 드러나고 있다. 장모가 요양급여 부정수급 혐의로 3년 실형을 선고받고 구속됐다. “법에 예외 없다”는 유체이탈식 메시지를 냈지만, 장모·아내 등 ‘처가 리스크’가 현실화했다. 윤 전 총장 쪽은 13일 자신에게 유리한 여론조사 중단 의혹을 제기했다. 지지율이 빠지면 ‘국민의 부름’도 사라진 셈이 될 테니, 불안할 것이다.
문국현 전 유한킴벌리 사장,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 대선 때마다 많은 이들이 지지율에 취하고, 욕망에 사로잡혀 들썩였지만 중도포기하거나 국민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대선 후보 등록일은 내년 2월13~14일이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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