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목 | 번역가·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
읽은 지 몇달이 지났는데도 가라앉지 않고 머릿속에서 떠도는 이미지가 있다. 편혜영의 단편 ‘미래의 끝’에 등장하는 동방생명 아줌마의 모습이다. 묘사가 자세하지는 않지만, 마치 소설의 화자와 함께 본 듯, 아니면 나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으로 보완된 듯 흐릿한 채로 생생하다. 그것은 날개가 없어 고단하게 걸어 다니는 아줌마 천사로서 내 머릿속을, 또 수십년 전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서울 어느 비탈진 가난한 동네를 떠돌고 있다. 헛된 희망이나 환상을 일체 배제하면서 상상 이상의 절망과 불안으로 우리를 이끌곤 하는 편혜영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을 두고 천사 운운하는 것은 심각한 오독이라 할지 모르지만, “‘동방생명’ 아줌마는… 나를 구했다” 같은 표현도 그의 소설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버텨보고 싶다. 그는 여간해서는 누가 누구를 구한다는 이야기는 하지도 않거니와 잘 믿지도 않을 듯한 작가이므로.
‘미래의 끝’은 실제로 중년을 바라보는 보험 외판원 아줌마가 열살짜리 소녀를 수치감으로 인한 자멸로부터 구하는 이야기다. 이 아줌마는 감히 편혜영의 소설 속에서 “한 사람한테 좋은 일은 다른 사람한테도 좋은 일이 돼” 같은 말을 할 수 있고, 그러고도 소설이 끝날 때까지 환멸로 무너진 환상의 잔해에 묻히지 않고 여전히 “땀을 흘리고 옷이 구겨졌지만 늘 뭔가를” 주면서 또 어느 동네를 떠돌고 있을 인물이다. 물론 편혜영의 소설이니만큼 “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생기자 여러 사람이 궁지에” 몰리면서 “미래는 바닥”나고 아슬아슬하게 지탱되던 현재도 무너지고 만다. 그럼에도 이 소설에서만큼은 동방생명 아줌마의 “활달한 생의 느낌”(단편 ‘가장 처음의 일’에 나오는 표현)이 죽은 미래에 크게 밀리지 않는 느낌이다.
그의 소설에서 부재하는 ‘미래’가 이렇게 주인공 자리를 위협받는 것 또한 드문 일이다. 이 단편에서도 그렇듯이 편혜영은 자신의 계급적 뿌리를 예민하게 의식하고 있으며 더 중요한 것으로, “나는 비로소 일생 동안 해야 할 노동의 종류를 생각하기 시작했다”(‘20세기 이력서’)는 발언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자신에게 그 계급에서 이탈하는 미래는 없다고 진작에 받아들인 듯하다. 따라서 그는 어떤 면에서는 내부로부터 이 계급의 미래를 이야기할 자격을 갖추어온 셈이고, 실제로 가차 없이 그 미래 또는 미래의 부재를 이야기해왔다. 나 혼자 편혜영 노동 연작이라고 생각하는 위의 작품들이 그런 예로, ‘20세기 이력서’는 “밥을 먹기 위해 하던 노동은 어느새 노동을 하기 위해 밥을 먹어야 하는 것으로” 바뀐 계급의 미래 없는 두 세대의 역사를 훑고 있다. ‘미래의 끝’에서 어머니는 나의 미래를 위해 보험을 들지만 몇번 내지도 못하고 미래를 포기한다. ‘가장 처음의 일’은 그렇게 사산한 미래를 버리는 개천에서 난 용의 이야기를 다루지만, 가까스로 실현된 미래는 “피로와 권태와 무기력”밖에 없는 황폐한 곳이다.
이런 소설적 인식은 아무래도 작가가 살아온 20세기 말부터 21세기에 이르기까지 노동 상황의 변화를 염두에 두고 읽어야 전모가 드러날 듯하다. 또 한편으로 폭이 매우 넓은 편혜영의 소설 세계의 큰 부분을 지배하는 불안과 공포도 노동계급이 느끼는 절망과 무관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동방생명 아줌마는 그런 절망 속을 걸어 다니고 있고, 여전히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도 노동하는 사람이 이렇게 아름답고 위엄 있게 그려진 예를 근래 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한가지, 답은 애초에 미래에 있지 않았다는, 이미 거기 있었다는 통찰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