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틱] 임우진ㅣ프랑스 국립 건축가
오랜만에 지방에 사는 친척 집을 방문했다. 숙모는 20여년만에 만난 나를 반갑게 맞이하며 거실로 안내한 뒤 주방으로 가려다 한마디. “차와 과일을 내올 테니 잠깐 티브이라도 보고 있어.” 잠깐이지만 나를 혼자 두는 게 꺼림칙했던지 티브이를 켜주는 것으로 어색한 정적을 덮으려 했다. 잠시 뒤 차와 과일을 놓고 앉았을 때는 티브이에 나온 한 연예인 근황에 관한 이야기를 듣느라 정작 듣고 싶었던 그의 20년은 묻지 못했다.
약속 때문에 늦어진 끼니를 위해 일행과 한 식당에 들어섰다. 제때 식사 못한 사람들이 군데군데 앉아 음식을 먹고 있었다. 혼자인 사람도, 일행과 동행한 손님도 모두의 시선은 하나같이 벽에 걸린 티브이를 향해 있었다. 별 특별할 것 없는 한 코미디 프로그램 재방송이었지만 모두는 뭔가에 홀린 듯 일행과 대화도 잊고 티브이 속 개그맨의 익살에 피식거리고 있었다. 티브이와 등지고 앉은 나는 앞자리 일행에게 자꾸 말을 걸었지만, 그의 시선이 나를 관통해 티브이로 향하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저녁 늦게 퇴근한 많은 한국의 아빠가 가장 좋아하는 때는 거실 소파에 드러누워 티브이를 켜는 순간이다. 온종일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그에겐 소중한 시간이다. 그렇지만 아빠가 좋아하는 야구나 골프 프로그램이 티브이에 흘러나오는 순간 거실에 있던 아이들과 아내의 시선은 다른 곳(주로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떠나는 것은 잘 느끼지 못한다. 거실은 그렇게 손가락질 한번으로 한사람의 시청각실로 변하고 가족들은 제 방으로 뿔뿔이 흩어진다.
1960대 말 보급되기 시작한 티브이는 부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모두가 보고 싶어 했기에 가족 ‘공동’ 공간인 거실에 주로 놓였다. 1980~90년대까지도 가족이 모여 앉아 스포츠경기나 드라마를 함께 보는 것은 흔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티브이가 모두의 공간, 거실의 중심에 자리 잡다 보니 서로 대화하는 것보다 함께 티브이를 바라보는 것에 익숙해진다. 요즘 아이들 스마트폰 중독을 걱정하는 기성세대가 정작 자신이 티브이의 소음과 화면에 중독된 상태라는 것을 깨닫기 어려운 이유는 수십년 동안 익숙해져 체화되었기 때문이다. 가족과 세대 간 대화 단절의 원인을 찾기 위해 굳이 근대화와 산업화의 거대담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티브이가 현대인의 개인화, 고립화에 한몫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기는 어렵지 않다. 사람의 시선을 독점하는 티브이의 공간장악력은 아무리 친하고 오랜만에 만난 사이라도 봐주지 않을 정도로 강력하다.
2023년 마지막 저녁, 지인 가족과 집에서 식사와 술자리를 가졌다. 어른끼리 대화가 무르익는데 자꾸 엄마에게 형들이 안 놀아준다고 보채는 그집 막내아들을 ‘처리’하기 위해 나는 그간의 (육아) 경험을 통해 체득한 마법을 발동해야 했다. ‘뽀롱뽀롱 뽀로로’가 태블릿 화면에 등장하자 아이는 거짓말처럼 얌전해지더니 작은 티브이와 함께 딴 방으로 순순히 ‘사라졌다.’ 그 덕에 어른들끼리 한참 동안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었다. 잠시 뒤 새해 카운트다운 시간이 되었고 케이크를 함께 먹자고 모두를 불러 모았다. 그런데 아무리 불러도 아이가 대답이 없어 나는 옆방까지 찾으러 나섰다. 컴컴한 방구석에 앉아 화면에 몰입해 있는 아이의 얼굴을 발견했을 때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뿔싸. 스마트폰에 중독돼 부모와의 대화조차 귀찮아하는 요즘 아이들의 행태는 편하다는 핑계로 중독을 훈련시킨 부모의 유산이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