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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도시에서 길을 잃다

등록 2021-08-05 18:39수정 2021-08-07 18:43

기 드보르, <벌거벗은 도시>(The Naked City), 1957, 심리지리학 지도.
기 드보르, <벌거벗은 도시>(The Naked City), 1957, 심리지리학 지도.

[크리틱] 배정한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 편집주간

도시를 걷다 길을 잃은 적이 있는가. 나의 첫 경험은 아홉살 때였다. 당시에는 드물었던 ‘일하는 엄마’의 노심초사 때문에, 나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혼자 집 밖으로 나가선 안 된다는 엄한 규칙을 지켜야 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탈출의 욕망이 터졌다. 친구 손에 이끌려 내게 허락된 영토 바깥으로 나갔다. 집과 학교를 잇는 경계선 너머 친구네 동네는 아이의 머릿속 지도에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세계였다. 어둠이 내렸고, 돌아오는 길은 혼자였다. 미궁처럼 얽힌 주택가 골목길을 헤매다 곧 깨달았다. 길을 잃었다는 것을.

연희동과 남가좌동의 경계 어디쯤에서 길을 잃고 백련산 기슭 홍은동으로 어떻게 돌아왔는지,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는지는 이제 기억나지 않는다. 한가지 분명한 건 두렵지 않았다는 느낌. 낙담이나 절망도 없었다. 낯선 풍경 속에서 아홉살 아이는 자신의 세상이 넓어지는 짜릿함을 누렸다. <길 잃기 안내서>에서 리베카 솔닛은 말한다. “사물을 잃는 것은 낯익은 것들이 사라지는 일이지만, 길을 잃는 것은 낯선 것들이 새로 나타나는 일이다.”

스스로 길을 잃은 이들이 있었다. 아방가르드의 후예, 자칭 상황주의자들은 길을 잃기 위해 도시를 표류(dérive)했다. 1957년, 기 드보르가 이끈 ‘상황주의 인터내셔널’은 소외와 획일을 낳은 소비자본주의 생활양식의 전복을 꿈꾸며 새로운 방식으로 도시를 경험하는 예술운동을 펼쳤다. 할 일 없이 도시를 방황하고 배회하면서 심리적으로 재구축된 환경을 체험하는 기획. 목적지 없이 걸으며 평소와 다른 지리 환경에 반응하는 감각과 정서를 섬세하게 살핀 그들의 도시 탐구는 ‘심리지리학’이라 불렸다.

상황주의는 해체됐지만 심리지리학의 후계자들은 여전히 도시에서 길을 잃고 있다. 어느 장소의 지도를 들고 다른 장소를 돌아다니며 일부러 길을 잃는 표류, 예를 들면 베를린 지도를 보며 서울을 방황하거나 시애틀 지도를 손에 쥐고 부산을 배회하며 도시를 탐험하는 작업. 로버트 맥팔레인은 “자기만의 길”이라는 글에서 심리지리학적 걷기 방법을 이렇게 안내한다. “런던 지도를 펼치고 지도 위 아무 데나 유리잔을 엎어 놓는다. 잔 가장자리를 따라 원을 그린다. 지도를 들고 도시로 나가 원과 가장 가까운 길을 따라 걷는다. 걸으면서 우연히 경험한 것들을 자신이 좋아하는 매체로 기록한다….” 비슷한 기법으로 서울 북촌에서 ‘길 잃기 위한 걷기’를 실천하며 시간의 콜라주를 실험한 사례도 있다.

길을 잃고서 얻는 기쁨, 그것은 발견과 확장의 즐거움이다. 하지만 스마트폰이 신체의 연장이 된 요즘은 길을 잃고 싶어도 잃을 수 없다. 옛 지도들 곳곳에 새겨진 테라 인코그니타(terra incognita), 미지의 땅이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직장이나 학교에 가는 길,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길, 무언가를 먹거나 사기 위해 오가는 길은 철저히 계산되고 조절된다. 낯선 곳, 익숙하지 않은 것과 마주치기 어렵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주 잠깐이라도 길을 잃기 원한다. 나는 매일 고속도로와 외곽 순환도로를 조합한 최단 경로로 분당과 신림동을 오가며 만나는 몰개성한 풍경이 너무나 싫다. 서너가지 다른 조합으로 출퇴근 운전 길을 바꿔가며 나는 일상을 깨지 않으면서도 잠시 작은 차이를 즐긴다. 한 친구는 눈 감고 지하철 노선도에서 택한 역으로 탈주하거나 정류장에 제일 먼저 도착한 버스를 타고 종점으로 흘러가는, 20대 시절의 취미를 아직도 즐긴다고 한다. 또 어느 친구는 늘 길 잃기를 갈망하며 익숙한 길을 버리고 낯선 길을 걷는다고 한다. 이유를 묻자 힘찬 답이 돌아왔다. “세상의 모든 경이로운 것을 발견하고 그 아름다움을 누리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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