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호 ㅣ에디터 부문장
# 박근혜 정부
“가석방은 법무부 장관의 고유 권한이다.”(2014년 12월26일, 청와대 브리핑,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
“기업인이라고 특혜를 받는 것도 안 되겠지만, 기업인이라고 역차별을 받아서도 안 된다.”(2015년 1월12일 새해 기자회견, 박근혜 대통령)
# 문재인 정부
“가석방은 법무부 가석방심사위원회가 진행하는 것이고, 청와대가 언급할 사안은 아니다.”(2021년 8월9일, 청와대 핵심관계자)
“재벌이라는 이유로 특혜나 불이익을 줘서는 안 되고 공정해야 한다는 것이 이재명 후보의 평소 생각이다.”(2021년 8월9일, 이재명 후보 측)
(…) 슬프다.
6년 전과 너무 똑같은 단어를 듣는 것이. 게다가 ‘대변인’은 ‘핵심관계자’로 뒷걸음쳤다.
강성국 법무부 차관, 구자현 법무부 검찰국장, 유병철 법무부 교정본부장, 윤웅장 법무부 범죄예방정책국장, 윤강열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김용진 대한법률구조공단 변호사, 홍승희 원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백용매 대구가톨릭대 심리학과 교수, 조윤오 동국대 경찰사법대학 교수. 총 9명. 이들이 8월9일 오후 2시부터 4시간 논의 끝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의 가석방을 결정했고, 박범계 법무장관은 그 결정을 ‘결재’했고, 청와대는 ‘지켜봤다’고 한다.
박 장관은 이 부회장이 가석방 대상에 포함된 이유로 “코로나19 장기화로 인한 국가적 경제상황과 글로벌 경제환경에 대한 고려”를 들었다. 가석방은 사면과 달리,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5억원 이상 횡령·배임 등의 범행을 저지른 자는 5년 동안 취업을 제한받고, 해외출국 때도 미리 승인을 받아야 한다. ‘가석방’이란 그냥 풀려난 것일 뿐, 법적으론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박 장관 논리라면, 앞으로 ‘취업제한’ 조치도 법무부가 풀어주겠다는 건가. 취업제한 조치 해제는 ‘특정경제사범 관리위원회’에서 결정한다. 법무부 차관이 위원장이고, 법무부 검찰국장, 대검찰청 형사부장, 기획재정부·행정안전부·산업통상자원부·공정거래위원회·금융위원회의 각 실국장급 공무원 및 ‘학식과 경험이 풍부한 자 중에서 법무부 장관이 위촉하는 사람’이 포함된다. 그러면 또 위원회가 결정하고, 법무부 장관은 결재하고, 청와대는 지켜보는 일을 국민들이 지켜봐야 되는가.
박 장관은 10일 “(이 부회장 취업제한 해제는) 고려한 바 없다”고 했다. 그런데 박 장관은 지난 4월19일에는 이 부회장 가석방·사면 가능성에 대해 국회 대정부질문 답변에서 “검토한 적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그때 “이 부회장의 가석방 내지 사면 문제는 실무적으로 대통령이 특별한 지시를 하지 않은 이상 아직 검토할 수 없다”는 말도 했다. 청와대는 10일 이 부회장 가석방에 대해 법무부와 사전 교감이 있었는지 묻는 질문에 “말씀드릴 수 있는 사안이 없다”, “청와대는 입장이 없다”고 했다.
다들 왜 이러시나. 쓴소리하겠다고 청와대 들어간 이철희 정무수석은 무엇 하고 계시나.
2019년 참여연대는 검찰 공소장 등을 토대로, 이재용 부회장은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최소 2조원에서 최고 3조6천억원의 부당이득을 얻었고, 반대로 국민연금공단은 최대 6천억원의 손실을 봤다고 했다. 국민들 노후자금에 직접적 피해를 끼치고도, 삼성전자가 자기 기업에 투자하는 것에 대해 국민들이 이재용 부회장께 감사해야 하나. 미국 엔론사의 전 시이오(CEO) 제프리 스킬링은 부정회계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아 2019년 12년 형기를 다 채우고 석방됐다.
동의하진 않지만, ‘국익을 위해 이재용 부회장을 풀어줘야겠다’는 판단을 할 수 있다고 본다. 더욱이 국민 여론도 이 부회장을 풀어주라는 의견이 높다. 그렇다면 리더가 직접 나서서 양해를 구하고 국민을 설득하는 시도라도 했어야 되는 것 아닌가. 이럴 거면 차라리 대통령 권한으로 사면하는 게 낫지 않은가. 최소한 비겁하다는 말은 안 들었을 것이다.
사족. 사면이든 가석방이든 이번 조처는 대한민국의 의식과 기업 관행을 또 한번 퇴행하게 만드는 데 일조할 것이다. 4.17%(삼성전자 총수일가 지분율) 지분만 지니고도 ‘오너’는 어떻게 ‘통 큰 투자 결정’을 내릴 수 있는가. 더 똑똑해서가 아니다. 오너에게는 ‘책임’을 묻지 않기 때문이다.
h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