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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비빔밥과 다문화

등록 2021-08-18 13:48수정 2021-12-07 11:11

[기억과 미래]
‘2020 도쿄올림픽’을 사흘 앞둔 지난달 20일 도쿄의 상징 시부야 스크램블을 방탄소년단(BTS) 앨범 홍보 차량이 지나가고 있다. 일본에서도 방탄소년단은 한류 열풍의 중심에 있다. 도쿄/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2020 도쿄올림픽’을 사흘 앞둔 지난달 20일 도쿄의 상징 시부야 스크램블을 방탄소년단(BTS) 앨범 홍보 차량이 지나가고 있다. 일본에서도 방탄소년단은 한류 열풍의 중심에 있다. 도쿄/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정병호|한양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

일본에서 친구가 왔다. 한일 대중문화개방 이전이니 벌써 20여년 전 일이다. 한국은 처음이었다. 야채를 좋아한다고 해서 점심으로 비빔밥을 시켰다. 비빔밥이 나오자 참 아름답다고 탄성을 지른다. 나도 새삼 찬찬히 보니 알록달록 갖은 나물에 볶은 고기와 반숙 달걀까지 예쁘긴 해도, 그저 평범한 비빔밥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음식은 어떻게 먹느냐고 물었다. 빨간 고추장과 참기름을 한 번씩 두르는 것을 보여주니 조심스레 따라 했다. 잠시 감상할 시간을 줬던 나는 숟가락을 들어 맨 위에 얹은 계란 노른자를 꾹 눌러 터트려 쓱쓱 비비면서 따라 하라고 했다.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어 마주 앉은 친구를 보니 입을 벌리고 경악한 표정이었다. 마치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부수는 야만인 보듯 했다. 비빔밥은 원래 이렇게 비벼서 먹는 거라고 아무리 설명을 해도 머리를 연신 가로 저으며 자기는 도저히 그렇게 못 하겠다고 했다.

잠시 궁리하던 그는 바깥쪽 나물부터 한 가지씩 조심스레 집어 그 맛을 음미하며 먹었다. 특히 나물이 맛있다고 꽤나 만족스런 표정이었다. 이렇게 한 가지 한 가지 다른 맛이 있는 것을 어떻게 그렇게 무참하게 섞어서 고유의 맛을 버릴 수 있냐고 했다. 하긴 일본요리는 원재료 맛을 중요하게 여기니 이것이 문화 차이구나 하고 이해해주었다. 그래도 고추장과 참기름으로 맛깔지게 비빈 그 비빔밥 맛을 못 보고 돌아간 것이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요즘 일본 젊은이들은 한국음식에 익숙해서 오사카 코리아타운까지 찾아와 고추장과 참기름을 듬뿍 넣어 비빔밥을 비벼 먹고 떡볶이까지 먹고 간다니 세상은 많이 변했다.

일찍이 비빔밥 같은 한국 음식문화에는 “미래의 전자회로 시대, 글로벌 국제화 시대에 적응하기 알맞은 수법과 철학이 담겨 있다”고 칭송한 사람이 있었다. ‘비디오 아트’를 창시한 세계적 아티스트 백남준 선생이다. 자신의 예술세계는 ‘비빔밥 문화’에서 비롯했다며, 자신은 거창한 예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어릴 때 먹던 비빔밥처럼 막 섞어놓은 것뿐이라고 했다. 여러 가지 재료를 비벼놓으면 뒤죽박죽 섞여 있어 혼돈스럽고 어지러워 보이지만, 서로 다른 맛이 어우러져 또 다른 맛을 내는 창조적 의미가 담겨 있다는 말이다.

요즘 세계적인 케이(K)팝, 케이문화 열풍을 보면 ‘비빔밥 문화’의 힘을 느낄 수 있다. 드디어 백범 김구 선생이 꿈꾸셨던 문화강국이 된 듯 우쭐한 기분이 들다가도, 가만히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 과연 ‘우리 것’이라고 주장할 만한 것이 얼마나 될까 고개가 갸우뚱해진다. 한류 음악을 선도하는 ‘아이돌’이라는 장르부터 일찍이 일본 대중문화가 차용했던 영어 개념이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도 뒤죽박죽 여러 나라말이 뒤섞여 확실히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 할 때의 ‘우리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렇게 다양하고 이질적인 문화 요소를 버무려서 무언가 새롭고 강렬한 음악을 만들어 내는 것이 어쩐지 ‘우리답다’고 느껴지니 이것이 바로 ‘한국식 다문화 비빔밥’이 아닐까?

한국식 다문화 비빔밥은 그냥 여러 문화를 한데 모아놓은 미국식 다문화 샐러드볼(큰 그릇에 담은 샐러드)이 아니다. 다양한 재료를 섞어 넣기만 한다고 절로 비빔밥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역시 고추장과 참기름이 있어야 한다. 비빔밥 한 그릇에는 한민족이 살아온 삶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톡 쏘는 고추장에는 오랜 고난을 겪으며 숙성된 눈물과 한이 담겼다면, 구수한 참기름에는 그런 고난 속에서도 웃음과 놀이를 잃지 않고 살게 해준 흥과 멋과 신명이 스며 있다. 이것을 식민과 분단과 전쟁과 이산으로 얼룩진 아픈 역사 속에서 체득한 약한 것, 작은 것, 억눌린 것들에 대한 연민의 정으로 버무려야 한다. 그리고 외세 침략과 독재 권력에 맞서 온 면면한 저항정신과 삐딱한 파격의 미학으로 담아내야 한다. 그렇게 만든 다문화 비빔밥이 세계인이 공감하는 한류 문화다.

요즘 나는 <슈퍼밴드> 프로그램을 보며 젊은이들이 비벼내는 ‘다문화 비빔밥 음악’의 정수를 맛보고 있다. 우리 세대가 모방과 저항 사이에서 갈등하던 외래문화를 이렇게 마음껏 가지고 노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통쾌하고 즐겁다. 이 젊은이들은 글로벌 사이버 문명을 마음껏 향유하며 온 세상 어떤 음악이든 겁 없이 버무려서 자기 음악으로 만들어 내고 있다. 그들의 용기와 실험 정신에 찬사를 보낸다. 그들의 기량과 예술성이 너무 뛰어나서 그 분야에서 이미 일가를 이룬 심사위원조차 “내가 좀 늦게 태어나야 했던 건 아닐까?” 하며 부러워했다. 나도 동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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