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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그때는 맞지만 지금은 틀리다

등록 2021-10-25 17:57수정 2021-10-26 02:34

[편집국에서] 길윤형|국제부장

2013년 가을부터 3년 반 동안 도쿄 특파원으로 지내면서 적지 않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 관계자들을 만났다. 일본 사회란 ‘거대한 갈라파고스’ 안에서 시름하는 총련 동포들과 <한겨레> 도쿄 특파원의 동선은 여러모로 겹칠 때가 많았다. 조선인·한국인을 겨냥한 혐오 집회에 항의하는 집회에서 처음 얼굴을 익히고, 동포들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힘들게 지켜온 우리 학교(조선학교) 후원 모임에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강제동원 피해자의 배상·보상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에서 익숙하게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가 됐다. 총련은 <조선신보>라는 기관지를 발행하는데, 동포 사회의 ‘속살’이 궁금해 머잖아 신문의 정기 구독을 시작했다.

같은 민족이기에 여러 감정을 공유할 수 있었지만, 뭔가 설명하기 힘든 이질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2014년 봄 무렵이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2014년 5월 일본과 납치 문제의 재조사를 약속하며 관계 개선의 첫발을 떼는 ‘스톡홀름 합의’라는 모험에 나섰다. 이에 대한 그해 7월2일치 <조선신보>의 분석을 읽고 느낀 충격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글을 쓴 이는 도쿄 이케부쿠로에서 함께 양 다리 구이를 뜯은 적이 있는 김지영 부국장(현 편집국장)이었다. 그는 “동북아시아의 낡은 역학 구도가 바뀌고 낡은 질서가 요동치고 있다”며 그 주된 동인으로 “중국의 부상, 미국의 조락, 그리고 조선의 핵 보유” 세가지를 꼽았다.

‘조선의 핵 보유라….’ 그때까지만 해도 ‘북의 핵 보유’는 현실과 다소 동떨어진 괴이한 얘기로 들렸다. 북이 실제 핵무장을 달성하려면 아직 멀었고, 그렇기에 진보 정권이 재집권한 뒤 ‘햇볕정책 2.0’을 통해, 이 난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제 돌이켜보니, 동아시아를 휘감는 거대한 지정학적 변화의 요인으로 저 세가지를 건져 올린 김지영의 분석은 탁월한 것이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북한의 핵 보유는 ‘기정사실’로 굳어져가는 중이다. 2017년 11월 말 화성-15형의 성공적 발사로 “국가 핵 무력의 완성”을 선언한 김 위원장은 이듬해 1월1일 신년사를 통해 ‘평화 공세’에 나섰다. 지난 7월 펴낸 저서 <신냉전 한일전>에서 이미 논했지만, 당시 북의 전략은 이런 게 아니었나 싶다. ‘먼저, 한-미 연합군사훈련을 중단시켜 주한미군을 약체화·무력화하면서 (장기적으로 비핵화를 한다는 전제 아래) 이미 무기화된 핵 무력을 일정 기간 보유한다. 그와 동시에 북핵 개발의 핵심이랄 수 있는 영변은 깔끔하게 폐기하되, 공식화되지 않은 일부 우라늄 농축시설은 유지한다. 그러는 한편 2016년 이후 부과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제재의 핵심 부분을 풀어 본격적인 경제 개발에 나선다.’ 김 위원장은 이런 전제 위에서 종전선언 등을 통해 북-미 관계를 정상화한다면, 자신을 겨냥한 여러 위협 요소를 제거한 채 경제 개발에 정력을 쏟아 독자 생존의 길을 갈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구상에 얼마나 많은 한국인이 찬성할지 알 수 없지만, 미국은 동의하지 않았고, 일본은 처절한 방해 공작을 벌이게 된다.

지난 도전이 실패한 뒤 우리가 지금 목도하고 있는 것은 남북 간의 처절한 군비 경쟁이다. 북에선 남을 향해 “내로남불 하지 말라”고 욕지거리를 하면서 변칙궤도를 그리는 이른바 ‘게임 체인저’들을 쏘아대고, 한·일 군당국은 그것이 한발인지 두발인지 의견 통일을 못 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종전선언이란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면서도,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을 쏘고, 핵추진 잠수함과 경항모 사업을 추진하는 등 군비 증강에 막대한 돈을 쓸어 넣는 중이다.

21일 한국이 쏘아올린 누리호를 보며 <비비시>(BBC) 등 몇몇 외신은 남북 간 군비 경쟁의 징후를 읽어냈다. 탄도미사일 개발이란 관점에서 본다면, 1.5t이나 되는 위성 모사체를 700㎞ 상공까지 띄워 올렸으니 대단한 성공이라 말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자들에게 격려의 말을 쏟아내던 문 대통령의 모습은 하늘로 치솟는 탄도미사일을 바라보며 개발자들을 부둥켜안던 김정은 위원장과 많이 닮았다. 햇볕의 도전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북핵과 경쟁·공존해야 하는 복잡한 선택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charis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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