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틱] 배정한 |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 편집주간
하늘이 유달리 높고 맑았던 이 가을, 새로운 ‘핫플’로 갑자기 등극한 장소가 있다. 별다른 시설이 있지도 않고 분위기 좋은 카페가 기다리는 것도 아니지만, 들어가려면 한시간 대기는 기본이고 만추의 기운 가득한 주말 오후엔 두시간 넘게 긴 줄을 서야 한다. 서울 용산공원이다. 용산공원? 용산공원은 적어도 10년은 더 지나야 개원할 텐데? 요즘 청년들은 용산 미군기지 장교숙소 단지로 쓰이다가 지난해 여름 문을 연 서빙고역 건너편 임시 개방 부지를 그냥 용산공원이라 부른다.
역사, 생태, 문화, 소통, 참여처럼 그 무게에 어깨가 내려앉을 것 같은 단어만 빼곡한 용산공원 기본계획 보고서를 쓰다 넌더리가 나서 인스타그램 속 용산공원을 구경했다. 셀 수 없이 많은 ‘#용산공원’ 포스팅이 쏟아진다. 개방 부지에서 찍은 사진들이다. 2, 3층짜리 붉은 벽돌 타운하우스, 세심하게 관리한 짙은 초록 잔디밭, 늦가을 단풍의 절정을 담은 풍경 사진들도 있지만, 인물 사진이 압도적으로 많다. 장안의 힙스터가 미군기지 한구석에 다 모였다. 최신 패션을 장착하고 나선 커플도 많지만, 혼자서 한가한 산책과 여유로운 피크닉을 즐기는 이들도 적지 않다.
사진 구경 못지않게 재미있는 건 역시 댓글 눈팅이다. 댓글의 주류는 “꼭 외국 같아요”다. “여기가 한국이라고?” “우리나라 아닌 것 같다”처럼 다양한 버전의 비슷한 댓글이 계속 달린다. “미국에 온 것 같아요”나 “미국 갈 필요 없어요”처럼 그 외국이 어딘지 지목하는 경우도 있고, “성수동보다 더 브루클린 같다”거나 “서울의 브루클린이야”라는 식의 구체적인 평가도 있다.
용산공원 임시 개방 부지(옛 미군 장교숙소 5단지). 사진 임한솔
견고하게 실용적으로 지은 벽돌집이 늘어선 주거단지의 어떤 면이 외국처럼 느껴졌을까. 저층 타운하우스 단지가 미국 교외 도시의 풍경과 엇비슷한 점도 있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경사형 지붕과 붉은 벽돌이 만들어내는 경관은 우리나라 도시의 평범한 골목에서 마주하는 익숙한 장면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장소가 미군이 긴 세월 빗장을 걸고 거주한 미지의 땅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외국 같다는 댓글을 쓰는 것도 아니다. 대부분의 방문자는 이 개방 부지가 기지를 공원으로 바꾸기 전에 임시로 문을 연 곳이라는 데는 관심도 없다. 그저 신상 공원이 하나 생겼고 하늘과 단풍이 근사하며 어수선한 도심 풍경과 달리 깔끔하고 사진도 잘 나온다는 정도의 긍정적인 느낌을 외국 같다고 표현하지 않았을까.
외국 같아요. 사실 이 말은 새로운 장소에 가거나 비일상적인 경관을 보고 우리가 무심결에 자주 내뱉는 일종의 감탄사에 가깝다. 가지런하게 정돈된 도시 가로도, 새로 문을 연 화려한 백화점도, 공장이나 창고의 흔적을 살린 레트로풍 카페도, 울창한 숲과 야생 초화가 풍성한 공원도 외국 같다, 즉 이국적이라는 말 한마디면 다 통한다. 장소나 경관에서 새로움을 감각해 기분이 좋을 때 우리는 왜 열등감 속을 허우적거리는 것 같은 표현, “외국 같다”를 습관처럼 쓰는 것인가.
여러 문화권에 늘 존재한 이국 취향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국 취향은 지금 여기에 없는 어떤 아름다움을 소유하려는 욕망이다. 평범한 일상 저 너머의 무언가를 동경하는 심미주의 태도와 연결된다. 가보지 않은 저기의 장소와 풍물을 여기에 상상으로 끌어오기. 허수경의 산문집 <너 없이 걸었다>에서 만난 단어 페른베(Fernweh)까지 끌어들이면 너무 과한 해석일까. ‘먼’이라는 뜻의 페른(Fern)과 ‘슬픔’을 뜻하는 베(Weh)가 결합된 페른베는 무작정 떠나고 싶은 마음, 먼 곳을 향한 멈출 수 없는 그리움이다. 인스타그램 ‘#용산공원’에서 만난 “꼭 외국 같아요” 덕분에 흥미로운 새 연구 주제 하나를 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