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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북한에서 만난 놀이와 웃음…심각한 얼굴로 겁주지 마라!

등록 2022-02-02 12:28수정 2022-02-03 02:31

마을 공터에서 놀이에 여념이 없는 북한 아이들. 임종진 사진가
마을 공터에서 놀이에 여념이 없는 북한 아이들. 임종진 사진가

[기억과 미래] 정병호 |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명예교수

북한에서 미사일을 쐈다. 새해 들어 벌써 일곱번째라고 한다. 이어진 뉴스 화면은 김정은, 당대회, 군사행진, 구호를 외치는 군중들. 지난 수십년간 달라지지 않았다. 늘 전하는 내용도 권력다툼, 식량난, 감시와 처벌 등이다. 저런 곳에서 어떻게 사람이 살까?

구호활동을 위해 나는 몇차례 북한을 방문했다. 이십여년 전 처음 갔을 때는 대기근의 상처를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평양에서 서울은 195㎞다.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참혹한 현실을 사는 사람들의 곤경에 마음이 아팠다. 그들은 자존심을 지키려고 거대 건축물과 재주를 뽐내는 아이들의 공연을 보여줬다.

그러나 정작 내 눈길을 끈 것은 골목과 빈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많은 아이들이 늘 무언가를 하며 열심히 놀았다. 어떤 놀이인지 궁금해서 차창에 코를 붙이고 열심히 살펴봤다. 무슨 놀이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자치기, 딱지치기, 총싸움, 고무줄놀이, 말타기, 땅따먹기. 어린 시절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늘 여럿이 함께 놀았다.

몇 해 전, 북한 미사일 위기가 고조되었을 때,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의 테사 모리스 스즈키 교수는 직접 평양 거리에서 찍은 놀고 있는 아이들 영상에 메시지를 달아 미국 대통령에게 보냈다. “이 아이들 머리 위에 폭탄을 떨어뜨리시겠습니까?”

냇가에서 벌거벗고 물장구치는 아이들, 얼어붙은 연못에서 썰매 타는 아이들, 모닥불 피워놓고 노는 아이들도 있었다. 탈북 청소년들에게 내가 찍은 영상을 보여주니 눈빛을 반짝이며 이야기했다. “얘들 강냉이 구워 먹는 거 맞지?” “아이다. 감자다!” “야~ 저리 놀면 정말 재밌지!” 어린 시절 놀이의 기억만으로도 생기가 돌았다.

아이들 못지않게 어른들도 놀고 있었다. 그들의 고단한 삶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이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무서운 미디어 이미지 때문에 평범한 주민들이 일상생활에서 누리는 놀이와 웃음이 묻혀버렸을 뿐이다.

모란봉 을밀대 주변 숲속에 자리를 깔고 앉아 ‘들놀이’를 즐기는 사람들을 봤다. 가족, 친구, 직장 동료로 보이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음식을 펼쳐놓고 먹고 마시며 흥겹게 놀았다. 함께 노래하고 춤들도 췄다. 평소 외부 사람을 경계하고 멀리하던 사람들이 손짓해 부르며 한잔하라 했다. 털썩 주저앉아 조금 놀다 가겠다고 하자, 웃으며 쳐다보던 안내원이 그만 가자고 손짓을 했다.

북한에서 설날은 ‘술날’이라고 한다. 설에는 술과 돼지고기를 배급한다. 배급만으로는 모자라 집집마다 대개 몇달씩 설날 음식을 준비한다. 설날 아침에는 떡, 지짐, 만두, 나물, 국수까지 푸짐한 음식에 옥수수와 누룩으로 직접 술도 빚어서 차례를 지내고 잔치를 한다. 새해 인사를 하면서 술을 마시기 시작해서 직장에서 신년사를 들을 때도 마시고, 신년의례를 마치면 친구집, 이웃집을 돌면서 본격적으로 음주가무를 한다. “그날은 친구들끼리 밤새 마시면서 보통 대여섯 집은 옮겨가요. 왜냐면 설날은 술날이니까.” 남한의 명절은 참 시시하다며 탈북 청년이 말했다.

사람들이 함께 노는 놀이가 어느 때부터인지 남한 사회에서는 사라져버렸다. 아이들은 방문을 닫고 컴퓨터게임을 하고, 데이트 중인 남녀도 각자 휴대폰을 본다. 디지털시대로 달려가면서 우리는 함께 즐기는 놀이를 잃었다.

코로나 방역으로 더욱 삭막해진 설 연휴가 지났다. 우리에게 명절은 친구, 이웃, 공동체의 잔치와 놀이가 사라진 초간단 가족행사가 되었다. 오랜만의 가족모임조차 조금 길어지면 스트레스 쌓인다고 할 지경이다. 그런 한국 사회를 다니엘 튜더는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라고 했다.

설 연휴 중에 접한 국내 뉴스도 답답한 소식뿐이다. 경제는 파국, 정치는 정쟁, 사회는 사건·사고만 다룬다. 미디어를 포함한 권력 엘리트들이 왠지 정치적 막장드라마로 우리를 중독시키는 느낌이다. 과연 한국 사회는 그것뿐인가? 한국은 물론 다양한 집단의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경합하는 역동적인 사회지만 우리의 일상이 모두 그런 막장은 아니다. 오히려 무수한 위기를 헤쳐온 평범한 어른들의 늠름한 웃음이 있고, 새로운 길을 열어온 성실한 달인들의 잔잔한 기쁨이 있는 사회다.

남과 북의 정치집단은 새해 첫달부터 미사일 발사와 선제공격 발언으로 온 국민을 질리게 하고 있다. 위험한 전쟁게임으로 우리의 눈과 귀를 사로잡으려 하지만, 우리에겐 더욱 귀중한 평범한 일상이 있다. 아이들과 함께 누리고 싶은 놀이와 웃음이 있다. 올해에는 당신들의 엽기적 게임을 더 이상 강요하지 마라. 지겹다. 심각한 얼굴로 겁주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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