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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생명 부분은 영장에서 빼달라” [슬기로운 기자생활]

등록 2022-02-17 16:53수정 2022-08-22 13:49

슬기로운 기자생활
삼성그룹 경영권 승계를 위해 계열사 간 부당한 합병을 지시·승인한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달 27일 서울중앙지법 1심 속행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삼성그룹 경영권 승계를 위해 계열사 간 부당한 합병을 지시·승인한 혐의로 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달 27일 서울중앙지법 1심 속행공판에 출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임재우 젠더팀 기자

기자 일을 하다 보면 종종 쟁송에 휘말리거나 판결문에 이름이 등장할 일이 생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좀처럼 그런 기회를 얻지 못했는데, 지난달 26일 한 판결문에 내 이름이 두 차례 등장했다. 원고는 최재경·이동열 변호사, 피고는 한겨레신문인 정정보도 청구 소송 판결문에서였다.

사정은 이렇다. ‘피고’ 한겨레신문은 2020년 9월16일 ‘“삼성 쪽, 이재용 영장서 삼성생명 건 빼달라 요구” 증언 나와’라는 제목의 단독보도를 한다. ‘검찰의 한 관계자’의 말을 인용한 200자 원고지 12장 분량 기사인데 핵심은 간단하다. 당시 ‘삼성 경영권 불법승계’ 사건의 핵심 피의자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대리하던 특수통 검사 출신 전관 변호사가 수사팀 검사에게 ‘삼성생명 관련 부분은 예민하니 범죄사실에서 빼달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이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이 청구되기 전에 벌어진 일이다. 더군다나 이 전관 변호사는 이러한 요구가 “최재경 변호사의 요청”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삼성전자의 법률고문이자 역시 검찰 전관인 최재경 변호사는 ‘특수통의 전설’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보도가 사실이라면, 그는 현직·전직 구분을 넘어서는 특수통의 ‘장엄한 계보’를 수사팀 검사에게 인지시키며 인상적인 제안을 한 셈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삼성생명 관련 부분은 이 부회장의 구속영장에 들어갔고, 이후 기소될 때 주요 혐의 중 하나로 포함되기도 했다. 민망하게도 ‘전관의 끗발’이 먹히지 않았다.

기사가 나오자 해당 전관 변호사는 발끈했다. 바로 반박 입장문이 나왔다. 구속영장 청구 전에는 영장에 어떤 범죄 사실이 담길지 알 수 없으므로 삼성생명 관련 내용을 빼달라고 했다는 보도는 앞뒤가 맞지 않고, 삼성생명 매각 건 역시 범죄 사실 중 “지엽말단적인 경위 사실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악의적인 허위 기사로 변호인들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한 데 대해 민형사상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도 했다.

법원의 판단은 어땠을까. 재판 과정에서 두 가지 사실이 새로 드러났다. 보도 직후 기사에 인용된 검찰 관계자가 “전관 변호사가 전화를 한 것이 아니라 직접 찾아와 ‘기소하지 말아달라, 영장 청구하지 말아달라’고 하면서 삼성생명 관련 내용은 무엇이든 간에 영장에서 빼달라고 했다”고 재차 확인했다는 것. 그리고 실제로 해당 전관 변호사는 2020년 2월부터 5월 사이에 이 부회장을 수사하던 서울중앙지검 경제범죄형사부 검사실을 여섯 차례 방문했다는 것. 결과적으로 서울서부지법 민사12부(재판장 이병삼)는 <한겨레>의 보도에 전관 변호사가 수사검사에게 ‘전화·연락’했다고 표현한 지엽적인 오류는 있으나 “보도내용의 중요 부분은 진실에 합치”한다고 판단했다. ‘원고’ 이동열·최재경 변호사의 정정보도 청구는 모두 기각됐다. “이동열 변호사가 2020년 2월에서 5월 사이에 수사팀 검사의 방을 직접 방문해 ‘최재경 변호사의 요청’이라며 ‘삼성생명 부분은 빼달라’고 요구했다는 검찰 내부 증언이 나왔다”고 기사를 썼더라면 법원이 지적한 ‘지엽적인 오류’도 사라질 뻔했다.

어떤 결론이든 기사의 진위를 법정에서 가리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다. 일부 오류가 뒤늦게 확인되는 경우도 있고, 무엇보다 취재원 노출의 부담이 크다. 해당 기사가 나간 뒤 사실관계를 재차 확인하는 데 조금 손을 보탰을 뿐이지만, 이런 방식으로 ‘전관의 고차원 변론 전략’이 명료하게 드러나는 것이 씁쓸했다.

여전히 궁금증은 남는다. 왜 검찰 전관 변호사는 ‘최재경의 요청’이라는 필살의 비기까지 써가며 “삼성생명 부분은 빼달라”고 했을까. 2015년 7월 이재용 부회장이 워런 버핏 버크셔 해서웨이 회장을 만나 삼성생명 매각을 논의했던 일이 왜 이 부회장의 ‘아킬레스건’이 되었을까. <한겨레>는 ‘이재용의 법정을 기록하다’라는 제목으로 이 부회장 재판을 꾸준히 연재해오고 있다. 이 연재물의 지난해 12월20일치 ‘이재용은 왜 “버핏과 미팅 일정 정해지면 알려달라” 했을까’를 보면 어느 정도 답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abbad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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