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마른 겨울 공원을 비집고 봄날의 표정이 번지고 있었다. 사진 배정한
배정한 서울대 조경학과 교수·‘환경과조경’ 편집주간
걷기의 미학, 도시에서 길을 잃다. 이 호기로운 주제를 내건 지난 학기 ‘환경미학’ 시간에 학생들과 도시 구석구석을 원 없이 쏘다녔다. 그 덕에 머릿속은 상큼하게 투명해졌지만, 날카로운 공기에 콧구멍 쓰라린 겨울이 시작되자 몸에 빨간불이 켜졌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온몸의 솜털마저 뾰족하게 곤두세우는 발바닥과 뒤꿈치 통증. 발음도 쉽지 않은 족저근막염이 꽤 심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몸만 일으키면 무조건 움직이게 되는 줄 알고 살았는데 꼭 그런 건 아님을 깨닫고 나니 흐릿하고 찌뿌둥한 겨울 하늘보다 더 우중충하게 기분이 급락하고 마음이 얼어붙었다. 게다가 햇빛이 줄어 세로토닌 분비가 감소하고 찐득한 우울의 먹구름이 피어오르는 겨울 아닌가. 마음껏 걸을 수 없는데다 끝날 줄 모르는 코로나 사태에 진창 같은 대선판까지 겹친 겨울, 푹 꺼진 소파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매일 넷플릭스만 돌리다 사놓고 묵혀둔 책 한 권에서 출구를 찾았다.
박물학자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에마 미첼의 <야생의 위로>는 집 주변 야생의 숲과 들판, 바닷가를 산책하며 채집한 “영혼을 치유해주는 자연의 힘”을 글과 그림, 사진으로 꾹꾹 눌러 담은 책이다. 열두 달의 자연 관찰 일기이자 반평생에 걸쳐 겪어온 우울증의 회고록이기도 한 책은 계절마다 요동치는 저자의 마음 풍경이 자연을 통해 어떻게 위로받고 회복되는지 생생히 보여준다.
에마 미첼의 담백한 기록은 낙엽이 땅을 덮고 개똥지빠귀가 철 따라 이동하는 10월에 시작해 몸이 움츠러들고 어두운 생각이 의욕을 짓누르는 긴 겨울을 헤쳐나간다. 산사나무 잎이 돋고 가시자두 꽃이 피는 3월, 뱀눈나비가 날아다니고 꿀벌난초가 만발하는 6월을 거쳐 뜨거운 여름을 통과한 뒤 다시 가을로 돌아오는 여정은 블랙베리가 무르익고 제비가 떠날 채비를 하는 9월에 끝난다. 힘든 순간마다 저자를 위로한 동식물의 모습과 자연의 현상을 세밀하게 포착한 묘사가 책 표지의 추천사처럼 “문학적 항우울제” 역할을 하며 위안을 준다.
미첼이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숭고한 황야나 희귀한 천연물을 탐험한 것은 아니다. 반려견과 함께 집 근처 숲을 산책하고 어린 시절 추억이 쌓인 해변을 거닐며 작은 난초가 있는 언덕을 찾는다. 일상의 자연을 산책하다 “보석처럼 알록달록한 낙엽 무더기 위에 서 있을 때, 막 돋아난 버들강아지를 발견했을 때, 그루터기만 남은 들판을 스쳐 가는 새매를 목격했을 때” 저자는 경이감에 젖고 삶의 의욕을 찾는다. 산책 중에 발견한 풀과 새를 차분히 그리고 사진 찍고 채집하는 과정에서 위로를 얻는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채집 황홀”의 과정이다.
경기도 시흥에 있는 시흥갯골생태공원. 사진 배정한
책 곳곳에서 새와 풀꽃, 흙이 노래한다. 책장 넘기는 것만으로도 숲이 발산하는 피톤치드를 들이마시는 것 같고 세로토닌 뿜어내는 햇볕을 흡수하는 것 같다. 온화한 황홀감을 주는 엔도르핀이 몸에서 분비되는 느낌도 든다. 사실 자연의 사물과 풍경이 스트레스와 피로를 감소시키고 면역력과 회복력을 증가시켜준다는 연구 결과는 차고 넘친다. 그러나 자연이 우리 심신에 영향을 미친다는 심리학과 신경과학 논문들과 다르게 이 책의 미덕은 우리를 문밖으로 나서게 유혹한다는 점이다.
저자와 함께 열두 달의 숲 산책을 느릿느릿 다녀온 안온한 기분이 든다. “세상이 혼란스럽고 망가진 곳처럼 보이고 암담한 생각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질 때, 나는 집에서 나와 나무들이 있는 곳까지 5분 동안 걸었다.” 평범해 보이는 이 문장을 여러 번 소리 내어 읽으니 발 통증을 참아낼 자신감이 생겼다. 운동화 끈을 조여 매고 잠시 동네 공원을 걸었다. 메마른 겨울 공원을 비집고 봄날의 은은한 표정이 번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