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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영희 칼럼] 박경석은 힘이 세다

등록 2022-04-04 15:52수정 2022-04-07 10:07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정치적 올바름(PC)에 대한 반대 움직임을 꺼리면 진짜 트럼프가 나올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박경석의 대답을 듣고 깨달았다. 이것은 정치적 올바름이란 말조차 사치스러운, 삶의 문제다. 누구를 이기는 게 목적이 아니라, 인간으로 함께 살자고 세상 사람들에게 이토록 간절히 말하고자 하는 박경석과 전장연과 장애인들은 그러니 질래야 질 수가 없다.
켄 로치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처럼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가 2017년 2월15일 사회보장위원회가 입주한 국민연금공단 건물 외벽에 스프레이로 자신의 이름을 쓴 뒤 사회보장기본법 개정 등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던 모습.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켄 로치의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처럼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가 2017년 2월15일 사회보장위원회가 입주한 국민연금공단 건물 외벽에 스프레이로 자신의 이름을 쓴 뒤 사회보장기본법 개정 등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던 모습.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김영희ㅣ논설위원실장

휠체어에 앉아 하얀 긴 머리를 질끈 묶고 장애인 시위 어디에나 출몰하는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이하 박경석)는 이제 전국구 인물이 됐다. 차기 집권여당의 대표가 공개토론을 하겠다며 상대로 그를 지목했다. 이번주 <문화방송> ‘100분토론’은 방송사와 형식과 일정 등 이견으로 무산됐지만, 이동권을 비롯한 장애인 문제가 당사자가 참여한 가운데 공론의 장에서 다뤄지는 모습을 볼 가능성은 여전히 있다. 박경석은 평소 “장애인 문제가 100분 토론 주제가 되는 게 꿈”이라고 말해왔다.

2001년 오이도역 리프트 추락사고를 계기로 불붙은 이동권 투쟁은 장애인들에겐 ‘코페르니쿠스적 전환’(김원영,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이었다. 중증장애인이 시설에서 나올 엄두를 내는 것도, 배우거나 일하러 가는 것도, 이동수단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동권은 그 자체를 넘어 그들이 세상으로 나와 사회적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를 갖게 됐다.

박경석은 서울역 지하철 선로 점거, 쇠사슬로 운전대에 몸을 묶는 버스 타기 투쟁,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으로부터 2004년까지 모든 지하철 승강기 설치와 저상버스 및 특별교통수단 도입 약속을 끌어낸 국가인권위원회 점거 39일 단식농성, 장애인등급제 폐지 등을 위한 광화문역 5년 농성 등에 언제나 제일 앞에 있었고 제일 마지막까지 있었다. 시위로 처벌을 받으면 노역을 하거나 벌금을 모아 내는 사이 어느덧 ‘전과 27범’이 됐다.

어릴 적 꿈이 마도로스였고 해병대에 자원했던 청년은 1983년 복학 뒤 동아리에서 행글라이더를 타다가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됐다. 5년 동안 집에서만 지냈다. 지난해 <비마이너>에 실린 홍은전 작가와 한 인터뷰에서 62살의 박경석은 그 5년이 이리 오래 운동할수 있는 힘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굉장히 힘들 때도 그 시간을 생각하면 위로가 되더라...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느낀다는 건 살아있다고 느끼는 거니까. 그때는 삶이 무감각했다.” 죽으려면 밖으로 나가야 해서 쌍둥이형에게 교회에 데려가달라고 했다. 죽기 위해 나갔던 교회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많이 달라졌다 할 것이다. 서울은 지하철 94%에 승강기가 설치되고 지선 저상버스 도입률도 50%를 넘는다. 덕분에 노인들도, 깁스를 한 사람도, 유모차를 끄는 이들도 편해졌다. 하지만 이것이 장애인들이 싸운 결과임을 아는 이들은 많지않다. 그들이 한강다리를 기어가며 선로를 점거해가며 요구하지 않았어도 우리 사회가 ‘이제 경제가 좋아졌으니 바꾸겠다’며 알아서 달라졌을까? 지역은 참혹한 수준이다. 시외·고속버스에 저상버스가 없다시피한 것은 물론, 장애인콜택시도 시외 가길 거부하거나 24시간 전 예약해야 하는 지역이 부지기수다. 교통약자법은 통과됐지만 ‘임의조항’인데다 ‘돈’은 지자체에 미뤄놨다. 전장연이 기획재정부에 장콜 등 특별교통수단을 보조금 금지항목에서 풀고, 서울엔 50%, 지역엔 70%의 국비를 지원할 것을 요구하는 이유다. 며칠 전 만난 박경석은 “환경이 달라졌다지만, 장애인들 가슴에 10㎝ 정도 찔렀던 칼을 5㎝ 정도 빼주고 이제 살만하지?라는 것과 뭐가 다른가”라며 “우리는 이제 사회에 관계를 바꾸자고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lt;크립 캠프&gt;의 포스터.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크립 캠프>의 포스터.

넷플릭스의 다큐멘터리 <크립 캠프>에는 법조항으로만 있던 ‘재활법 504조’ 시행을 요구하며 주디스 휴먼을 비롯한 미국의 중증장애인 100여명이 1977년 샌프란시스코 연방청사를 24일간 점거했던 모습이 나온다. 이들을 지지하는 하원의원 2명이 농성장에서 연 청문회에 마지못해 앉아있던 보건복지부 대변인을 향해 휴먼은 일갈한다. “동의의 표현으로 끄덕이는 건 그만해주시죠. 우리 이야기를 전혀 이해 못하는 것 같으니까요.” 연방자금이 쓰이는 학교, 병원, 교통수단 등에 차별을 금지하는 504조 시행 이후 시설에 보내는 게 당연시되던 미국의 장애인들은 지역사회에 나오게 된다. 사람들은 ‘역사를 바꾼 순간’이라고 말했다.

지난주 만난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는 “지난 21년간 약속은 반복되고 장애인들의 사건은 비극적으로 소비되고 잊혀지곤 했다. 우리 시위의 본질은 사회에 관계를 새로 맺자고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영희 기자 dora@hani.co.kr
지난주 만난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대표는 “지난 21년간 약속은 반복되고 장애인들의 사건은 비극적으로 소비되고 잊혀지곤 했다. 우리 시위의 본질은 사회에 관계를 새로 맺자고 요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영희 기자 dora@hani.co.kr

이번이 그런 계기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상대는 토론배틀의 ‘달인’인 당대표인데다 사실 박경석은 말재주도 좋지 않다. “자신 있냐”고 묻자 그는 말했다. “말로 이기겠나. 그런데 설사 99%로부터 욕을 먹더라도 우리의 이야기 하나만 제대로 듣는 기회라면 그걸로 된다. 우리에게 가장 무서운 건, 욕먹는 게 아니라 잊혀지는 거니까. 지난 20년간 시설에서, 지하철에서, 수많은 사건이 있었지만 비극적으로 소비되고 반복적으로 잊혀졌다. 인간의 기본적 삶도 누리지 못하고 죽어가는 것보다는 낫지 않나.”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지난 2일 한 라디오 방송에 나와 “정치적 올바름(PC)에 대한 반대 움직임을 꺼리면 진짜 트럼프가 나올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박경석의 대답을 듣고 깨달았다. 이것은 정치적 올바름이란 말조차 사치스러운, 삶의 문제다. 누구를 이기는 게 목적이 아니라, 인간으로 함께 살자고 세상 사람들에게 이토록 간절히 말하고자 하는 박경석과 전장연과 장애인들은 그러니 질래야 질 수가 없다. 박경석은 힘이 세다.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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