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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최초의 어린이날, 1922 또는 1923년 5월

등록 2022-05-05 15:36수정 2022-05-06 02:40

[나는 역사다] 방정환(1899~1931)

어려서 유복했다. “어느 가게든지 빈손으로 가서 마음대로 집어 먹고 다니면” 나중에 할아버지가 계산해주는 부잣집이었다고 방정환은 회고한다. 그러다 하루아침에 집이 망했다. 다니던 학교도 옮겨야 했고 아동 노동에 내몰렸다. 전기작가 민윤식에 따르면, 이것이 그가 어린이 인권에 관심을 가진 계기라고 한다. 훗날 방정환은 국제연맹보다 1년 앞서 “세계 최초의 아동 인권선언”을 내놓는다.

그러던 어느 날 천도교를 이끌던 종교지도자 손병희와 면담한다. 종교활동을 열심히 하던 그를 교단 간부들이 좋게 본 것이다. 방정환은 몰랐지만 사실은 사윗감 면접이었다. 손병희가 “어쩌면 사람이 그렇게 마를 수 있느냐”며 실망하자 “사람은 똑똑한데 어릴 때 너무 굶주려 그런 것이므로 잘 먹으면 괜찮을 것”이라고 주위에서 설득했다고 한다.

과연 방정환은 결혼 뒤 날개를 단 듯 활동가의 능력을 드러냈다. 3·1운동 때는 인쇄물을 찍어내다 잡혀가기도 했고, 이후 일본을 오가며 사회운동을 함께할 조직원을 포섭했다. 사회주의 활동가들과 영향을 주고받았다.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 <왕자와 제비>를 방정환은 <행복한 왕자>로 번안했는데, “원작에서 왕자와 제비는 하느님의 낙원에서 축복을 받지만, 방정환은 세상 사람들이 왕자와 제비의 정신을 전하는 것으로 고쳐” “천도교사상과 사회주의 사상이 어우러진” 작품을 만들었다고 연구자 염희경은 지적한다.

1922년에는 어린이날을 열었다. 이때는 천도교 행사였다. 1923년에는 종교·시민단체 40여개를 끌어들여 어린이날 행사를 함께 주최했다. 1922년부터 세면 올해 5월5일은 어린이날 100주년이고, 1923년부터 세면 제100회 어린이날이다. 아무려나 의미 깊은 날이다.

바쁘게 살았다. 글을 쓰고 강연을 했다. 조직을 꾸리고 매체를 편집했다. 잡지사 경영은 스트레스가 심한 일이었다. 자주 코피를 쏟던 방정환은 1931년 7월에 진료를 받으러 병원에 갔다. 얼마 뒤 고혈압과 신장염으로 입원하더니 다시 일주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한국 나이 서른셋이었다. 숨지기 하루 전 동료들에게 남긴 “일 많이 하라”는 말이 유언이 되고 말았다.

김태권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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