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다] 박중양 (1872~1959)
처음에는 개화파였다. 김옥균 암살(1894)과 독립협회 해산(1898) 때문에 조선에 환멸을 느꼈다. 유학 시절 일본에서 고생했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잘해주자 그 측근이 된다. 귀국 뒤 관료로 일했다. 조선이 망했을 때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였다.
일본 문물을 좋아했다. “일본 맥주는 마셔도 안 취한다”며 예순병을 마셨다. 머리를 잘라야 개화가 된다며 가위 든 관리를 길목에 숨겨 사람들 상투를 자르게 했다. 새 길을 내면 잘살게 된다며 대구 성곽을 밀어버리고 동성로 등 사거리를 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 시위에 맞불을 놓을 자제단을 결성했다. 3·1운동을 한국 민중 대 일본 관헌의 싸움이 아니라 조선 내부 갈등으로 모는 물타기 전략이었다.
사람을 가볍게 봤다. 일본 관리를 만나러 간다며 기사에게 과속운전을 강요해 행인을 쳤다. 속리산 여승을 강간했다. 여승이 숨진 채 발견되어 한때 관직에서 물러났다가, 여론이 잠잠해지자 다시 복귀해 잘 먹고 잘살았다. 평소 개화 문물이라며 지팡이를 짚고 다녀 “박작대기”라고 불렸는데, 일본인 순사도 마음에 안 들면 지팡이로 때렸다고 한다.
이른바 ‘친일부역자’라 불리는 사람들을, 나는 민족주의를 배제한 채 바라보고 싶다. 평범한 한국 사람을 낮추보고, 낮은 직급 공무원에게 갑질하고, 개발을 구실 삼아 토목공사를 밀어붙이고, 체제에 저항하는 사람을 위선자로 모는 본새는 오늘날에도 낯설지 않다. 박중양의 일화에서 한국 사회 극우의 보편적 정서 같은 것이 엿보인다.
해방 뒤 반민특위에 체포돼 1949년 1월12일 법정에 섰지만, 박중양은 자신이 옳다고 소리쳐 ‘확신형 친일파’로 불렸다. 병보석으로 풀려나고도 일제강점기가 좋았다고 큰소리쳤다. 1957년에는 이승만을 비꼬는 책자를 써 이승만에게 보내는 기행으로 정신병으로 의심받았다. 1959년 세상을 떠났다.
김태권 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