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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제 남편이 독재를 하면 제가 앞장서서 타도하겠습니다”

등록 2022-06-09 18:17수정 2022-06-10 02:08

[나는 역사다] 이희호(1922~2019)

이희호가 남긴 말을 통해 되짚는 이희호의 삶, 다섯 장면. 2015~2016년 <한겨레>는 ‘이희호 평전―고난의 길 신념의 길'을 연재했다. 앞의 네 장면은 여기서 뽑았다.

①“일요일마다 흑인들이 사는 집에 가서 점심도 같이 먹고 저녁 예배까지 보고 왔지요. 흑인들도 존중을 받는 날이 빨리 오기를 바랐지요.” 이희호는 1950년대에 미국 유학을 떠난다. 그때 여성으로 드문 일이다. 지역 흑인공동체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고 한다.

②“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런 모험을 했나 생각이 들어요.” 이희호는 한국에 돌아와 강의하고 와이더블유시에이(YWCA)에서 총무를 맡았다. 1962년에 젊은 정치인 김대중과 결혼한다. 주위에서 반대했다. 이희호는 잘나가던 엘리트 신여성이었지만, 김대중은 애 둘 딸린 홀아비이자 5·16 쿠데타로 의원직을 빼앗긴 ‘정치낭인'이었기 때문이다. 훗날에도 왜 김대중과 결혼했나 질문에 이희호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답했다. “잘생겼잖아요.”

③“여러분, 민주주의를 원하십니까? 제 남편이 만약 독재를 하면 제가 앞장서서 타도하겠습니다.” 1971년 대통령 선거 때 이희호의 연설이다. 수십년 군사독재에 맞서 김대중은 야권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이희호는 민주화 투쟁 동지였다. “그때(1980년) 남편이 (전두환이 이끄는) 신군부의 회유에 굴복했더라면 나는 남편을 용서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④“김정일 위원장은 말하는 것이 거침이 없고 자연스러웠어요. 유머 감각도 있고요. ‘저 표현력을 어떻게 지금까지 (외부 세계 모르게) 감출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하다가 ‘아, 북한에는 선거가 없지' 하고 자문자답하면서 혼자 웃음을 삼켰지요.” 2000년 남북정상회담 때 김대중과 이희호는 평양에 간다. 김대중이 세상을 떠나고 남북 관계가 좋지 않던 시절에도 이희호는 북한을 찾아 한반도 평화를 위해 노력한다.

⑤“노벨평화상 상금과 동교동 자택은 김대중·이희호 기념사업을 위해 사용할 것.” 이희호가 세상을 떠난 날은 2019년 6월10일. 동교동 자택을 어떻게 사용할지 유언을 남겼다. 아쉽게도 유언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김태권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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