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다] 파라켈수스(1493~1541)
연금술사이자 의사였다. 본명은 테오프라스투스 봄바스투스 폰 호엔하임. 파라켈수스라는 이름은 스스로 지었다. ‘파라’와 ‘켈수스’라는 말을 합했다. 파라는 그리스말과 라틴말에서 ‘비슷하다·대적하다·넘어서다’ 따위 여러 뜻으로 새긴다. 켈수스는 로마 때 유명한 의사. 자신을 ‘유명한 켈수스와 맞먹거나 넘어서는 사람’이라고 부른 셈.
스위스 바젤에서 교수를 하던 시절 파라켈수스는 거침이 없었다. 1527년 6월24일 바젤대학 앞에 책을 쌓아놓고 불을 놓았다. 당시 의사들이 교과서로 모시던 갈레노스와 이븐 시나의 고전들이었다. 여태까지 의학의 가르침이 잘못됐으니 자기 이야기만 들으면 된다는 것이었다. “교황의 편지를 불태운 마르틴 루터를 떠올리게 하는”(곽경훈) 결기였다.
의사로서 솜씨가 좋았기 때문에 그에게 치료받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오만한 태도는 논란을 불렀다. 높은 사람들의 비위를 거슬렀다. 1528년 생명의 위협을 받고 달아나듯 바젤을 떠나야 했다. 매독의 특효약이라며 비싸게 팔던 유창목이 효과가 없더라는 사실을 관찰을 통해 밝혀내는 바람에 당시 유럽 정치의 막후 실력자였던 푸거 가문의 미움을 샀다. 떠돌이로 지내다 1541년에 객사한다. 음모론이 있으나 지금 와서 진실은 알 수 없다.
이대로 잊힐 수도 있었다. 그런데 파라켈수스의 명성은 그때보다 지금이 높다. 실험과 관찰을 중요하게 여기던 태도 때문이다. 오래된 의학서를 해석하는 대신 현장에서 외과수술을 하던 이발사, 산속을 돌아다니는 약초꾼, 아이 받던 산파를 대학 강단에 세워 지식을 나눴다. “모든 약은 독이다, 다만 용량의 문제일 뿐”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시대의 한계도 있다. 환자에게 아편을 처방했고 연금술에 매달렸다. 다만 그때 연금술은 오래 사는 방법을 연구하는 ‘학문’이기도 했다는 사실을 나는 지적하련다. 금을 만드는 신비의 물질이 영원한 생명을 준다고 주장됐기 때문이다.
오늘날 파라켈수스는 의학과 화학, 약학의 선구자로 기억된다. 바젤약학박물관에는 그가 쓰던 방이 복원되어 있다. 바젤에 들렀을 때 유리벽 너머로 그 방을 들여다본 적이 있다.
김태권 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