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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선정적·성차별적 제목, 고백합니다

등록 2022-07-18 18:38수정 2022-07-20 15:42

트위터 갈무리
트위터 갈무리

[편집국에서] 정은주 | 콘텐츠총괄

15일 인천 미추홀구 인하대 캠퍼스 한 단과대학 건물에서 학생 ㄱ씨가 추락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날 새벽 학교 건물 앞에서 출혈이 많은 상태로 발견돼 인근 병원으로 옮겼지만 숨졌습니다. 경찰은 현장 조사에서 ㄱ씨가 사망하기 전까지 함께 술을 마셨던 ㄴ씨 휴대전화를 발견했습니다. 경찰은 ㄴ씨를 조사하다 범죄사실을 확인하고 긴급체포했고, ㄴ씨는 ㄱ씨를 성폭행한 뒤 건물에서 추락해 숨지게 한 혐의로 17일 구속됐습니다.

이 사건은 <연합뉴스>가 15일 오전 7시39분에 ‘인하대서 여성 옷벗은 채 피흘리고 쓰러져… 경찰 수사’라는 제목으로 처음 보도했습니다. 다른 언론들도 뒤따라 ‘옷벗은 채’ ‘탈의한’ ‘나체로’ 등 피해자 모습을 묘사한 제목을 달아 내보냈습니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은 이날 오후 3시 기준 포털사이트 네이버에서 검색된 인하대 학생 사망사건 관련 뉴스를 전수 분석해 언론의 보도윤리 위반을 지적했습니다.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신문윤리실천요강 제3조 보도준칙에 따르면 ‘범죄·폭력·동물학대 등 위법적이거나 비윤리적인 행위를 보도할 때 선정적이거나 자극적인 표현을 사용해서는 안 되며 저속하게 다뤄서도 안 된다’고 선정 보도를 금지하고 있다. 사건 발생을 알리고자 한 의도였다 하더라도 ‘나체로’, ‘알몸으로’ 등의 선정적이고 불필요한 묘사는 보도윤리에 어긋난다”고 말입니다. 인하대 학생 사망사건 관련 선정적·성차별적 표현을 제목에 사용한 언론사 이름도 공개했는데 <한겨레>는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는 이 사건 기사의 제목을 언론사별로 어떻게 뽑았는지 비교하는 글이 화제가 됐습니다. 대부분의 언론사가 ‘알몸’ ‘옷벗은 채’ ‘여대생’ ‘여성’ 등의 표현을 썼지만 한겨레 제목에는 그런 표현이 없다며 “한겨레 보도윤리를 생각하게 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또 다른 누리꾼은 “한겨레가 국내 언론 최초로 젠더데스크(2019년 5월)와 젠더팀(2020년 11월)을 구성했으며, 자체적으로 성평등(젠더)보도 가이드라인’(2021년 5월)을 만들어 미디어 젠더편향을 극복한 언론”이라고 치켜세우고, “모든 언론이 ‘여대생’에 집중하고 있을 때 한명의 ‘학생’으로 보는 이유이기도” 하다는 글을 썼습니다. 칭찬 글은 1만명 이상이 리트위트했습니다.

민주언론시민연합과 누리꾼의 반응을 지켜보며 한겨레의 꾸준한 노력이 인정받은 것 같아 기쁘면서도 마음 한편이 불편했습니다. 특히 “젠더편향을 극복한 언론”이라는 평가는 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성차별·성범죄 보도에서 언론이 저지르는 잦은 잘못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진화 중인 언론일 뿐입니다. 성범죄 기사에서 몰카·도촬을 ‘불법촬영’, 성적 행위를 강요해 만든 영상을 ‘성착취물’이라 써왔고, 외모지상주의나 성 역할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표현을 쓰지 않으려 힘씁니다. 하지만 관행은 뿌리 깊어 부적절한 표현인지 인지하지 못하고 사용할 때도 여전히 있습니다. 편집자, 젠더데스크 등이 이를 발견하고 내부 논의를 거쳐 수정하곤 합니다. 인하대 학생 사망사건도 그런 게이트키핑(뉴스 취사선택 과정)이 이뤄진 사례였습니다.

이날 한겨레 기사는 오전 10시43분에 나왔습니다. 첫 제목은 ‘대학 내 알몸 상태로 발견된 여대생 숨져…경찰 수사’로 연합뉴스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10시47분에 이 기사를 본 편집자는 ‘알몸’이란 단어가 부적절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제목에 선정적·자극적인 내용을 부각하지 않는다’고 규정한 한겨레 젠더보도 가이드라인이 그 근거였습니다. 이미 알려진 사건이라 ‘여대생’이란 표현도 불필요하다고 봤습니다. ‘여대생’ ‘알몸’이라는 단어를 삭제한 뒤 10시51분 ‘인하대 교내서 피흘린 채 발견된 학생 숨져…경찰 수사’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다시 내보냈습니다. 부적절한 표현을 신속하게 바로잡았지만 잘못 끼운 첫 단추의 흔적은 구글에 남아 있습니다.

한겨레는 성차별·성범죄 보도 악습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해왔지만 완전히 빠져나왔다고 말하긴 어렵습니다. 게이트키핑이 작동된다는 걸 확인했지만 균형점을 찾으려면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합니다. 앞으로도 부족한 부분을 되짚어보고 계속해서 진화하는 언론이 되겠습니다.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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