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다] 김낙중(1931~2020)
김낙중의 활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한국 사회의 해묵은 숙제다.
젊어서 이북에 다녀온 것은 사실이다. 자기가 직접 만든 통일안을 들고 이북 정권을 설득하겠다며 임진강을 넘어갔다. 좋게 보아도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차갑게 말하면 이용당하기 좋은 행동이었다. 이남에 군사정권이 들어선 이후 수시로 잡혀가 얻어맞고 옥살이를 했다. “나에게 대한민국의 고문사를 쓰라면 잘 쓸 수 있을 것이다. 왜냐면 50년대 고문, 60년대 고문, 70년대 고문, 90년대 고문을 다 경험했기 때문이다.” 2014년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훗날 북한 정부의 돈을 받았다는 것도 사실이다. 민중당 활동을 하며 정치자금이 필요했는데, 마침 누가 수상한 돈을 듬뿍 집어주었다. 그때는 여건 야건 정치자금이 투명하지 않았고 어찌어찌 어둠 속에서 돈을 변통하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조심스럽지 못한 처신이었다. 1992년 사달이 났다. 김낙중은 잡혀갔고 민중당 관계자 한분은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문제는 한국 사회 우파의 대응이다. 두가지 사건을 하나로 엮어 공안정국을 만들었다. “36년 동안 암약한 간첩 김낙중” 당시 보수언론이 붙인 무시무시한 호칭이다. 서른여섯해 동안 저질렀다는 이렇다 할 위험한 일은 대지 못하면서 말이다. 법정에서 김낙중은 무기징역을 선고받는다.
그때 우파는 김낙중을 편드는 사람까지 공격했다. 야당 정치인 김대중이 김낙중의 인권 문제를 입에 올리자 ‘옳다구나' 달려들었다. 보수 여당은 김대중과 김낙중, 두 김씨를 하나로 묶어 “사상이 의심스럽다”며 공격했다. 정작 한국 사회가 침묵하는 동안 국제사회가 김낙중을 ‘양심수'로 부르며 구명운동을 벌였다.
김낙중은 1998년에 감옥을 나왔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뒤 일이다. 세상을 떠난 날은 2020년 7월29일. 평생 다섯번 사형선고를 받고 열여덟해를 옥살이했다. 그를 알던 사람은 김낙중을 평화운동가·통일운동가로 기억한다. 반면 우파는 21세기에 들어서도 ‘간첩' 타령이다. ‘조갑제닷컴’이 “간첩 출신 김낙중의 아들”이라는 기사를 쓴 것이 2013년의 일이니.
김태권 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