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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30년 뒤에야 연구 성과 인정받아 노벨상 받은 여성 유전학자

등록 2022-09-01 18:20수정 2022-09-02 02:38

[나는 역사다] 바버라 매클린톡(1902~1992)

괴짜였나 보다. 잠시 대학교수로 있을 때, 열쇠를 안 가져왔다며 건물 벽을 타고 연구실에 들어간 일화가 있다. 옥수수 유전학 연구 외에는 신경 쓰지 않았던 걸까.

실력만큼은 인정받았다. 1940년대에 여성 세번째로 미국 국립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 됐고, 여성 최초로 미국 유전학회 회장이 됐다. 그러다가 학계에서 고립됐다. 1950년 논문을 쓰고 이듬해 학회에 나가 발표했다. 질문도 없고 이렇다 할 반박도 없었다.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군. 도대체 뭐라는 거야?”라는 비아냥도 들었다고 했다. 몇해 뒤 논문을 다시 쓰고 또 발표했지만, 반응은 싸늘했다. 동료 연구자들이 자기 연구를 모르는 척한다고, 매클린톡은 생각했다.

매클린톡의 연구가 시대를 너무 앞섰기 때문에 사람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설명이 있다. 매클린톡은 이동성 유전자(트랜스포존)의 존재를 밝혔다. 어떤 유전자는 있던 자리에서 사라졌다가 엉뚱한 자리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마치 점프하듯이(그래서 ‘점핑 유전자'라고도 한다). 그때까지 상식과 다른 얘기였다. 그런데 정성욱은 2010년 한국과학사학회지에 발표한 논문에서 매클린톡의 연구가 정말로 무시당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당시 초파리 유전학과 분자 유전학이 주류 유전학이 되면서 옥수수 유전학이 밀려나던 참이었고, 매클린톡은 그래서 고립감을 느낀 것이라고.

어찌 됐건 매클린톡은 외로웠을 터. 그래도 10년, 20년 흐르며 매클린톡의 연구를 뒷받침하는 다른 학자들 연구가 하나둘씩 발표됐다. 결국 1983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집에 전화기가 없어서 라디오로 그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여성 단독으로는 첫번째였다.

“나 같은 사람이 노벨상을 받다니, 불공평합니다. 옥수수를 연구하는 동안 나는 모든 기쁨을 누렸어요. 옥수수가 이미 충분한 보상을 해줬습니다.” 매클린톡의 수상 소감이다. “내 생각이 틀림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조롱도 비난도 견뎠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밝혀질 것이라 생각했거든요.” 지금부터 삼십년 전, 1992년 9월2일 바버라 매클린톡이 세상을 떠났다.

김태권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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