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앞 왼쪽) 중국 국가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앞 오른쪽)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16일(현지시각)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에서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장에 나란히 입장하고 있다. 사마르칸트/AP 연합뉴스
[편집국에서] 길윤형 | 국제부장
세계에서 가장 난해하고 미묘한 양국 관계가 뭐냐고 묻는다면, 아무래도 중-러 관계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양국은 한때 사회주의라는 이념을 함께했던 ‘형제국’이었고, 이후엔 격렬히 대립했던 ‘진영 내 라이벌’이었으며, 이제는 미국과 서구의 압박에 맞서 협력을 강화해야 하는 ‘전략적 동반자’가 됐다. 이 긴 변화의 흐름 속에서 양국 간 ‘힘의 역관계’ 역시 크게 변했다. 옛 냉전 시절엔 소련이 압도적 영향력을 뽐냈지만 이제 러시아 경제규모는 세계 2위 대국으로 성장한 중국의 9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지난 2월 말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양국 관계에 또 한번의 큰 변화가 진행 중임을 확인할 기회가 있었다. 자신의 3연임이 정해지는 중국공산당 제20차 당대회(10월16일)를 앞둔 시진핑 국가주석과 최근 우크라이나 전황이 악화하며 궁지에 몰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15일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가 열린 우즈베키스탄에서 만난 것이다. 둘이 어떤 대화를 나눌지 마른침을 삼키며 지켜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날 오후 시작된 정상회담 머리발언이 외신을 통해 전해지기 시작한 것은 한국 시각으로 밤 9시가 넘어서면서부터였다. 양국 정부가 이튿날 공개한 발언 전문을 살펴보다 나도 모르게 긴 탄식을 내뱉고 말았다. 전쟁이라는 ‘잘못된 선택’으로 화를 자초한 푸틴 대통령의 ‘절박함’과 이를 무언으로 힐난하는 시 주석의 ‘냉담함’이 생생히 전해져왔기 때문이다.
미-중 간 전략 경쟁이 시작된 국제 정세 속에서 양국 협력이 필요하다는 데는 이견이 있을 리 없었다. 시 주석은 “러시아와 협력해 대국이 영도하는 역할을 다해 혼란으로 뒤엉킨 세계에 안정을 가져오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에 대해선 “피차의 핵심적 이익과 관련된 문제에는 서로를 지지한다”고 말하는 데 그쳤다. 발언은 짧았고 실무적이어서 차갑게 느껴졌다. 중국은 그나마 예의를 차린 것이었다.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는 아예 “지금은 전쟁하는 시대가 아니다”라며 훈계를 늘어놓았다.
무모한 전쟁을 일으키고 뒷감당을 못하는 데 대한 실망감 때문이었을까. 중국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의 16일치 1면 톱은 중·러 정상이 아닌 샵카트 미르지요예프 우즈베키스탄 대통령이었다. 1면에 시 주석과 미르지요예프 대통령이 함께하는 사진은 석장이나 실렸지만 푸틴과 악수하는 사진은 없었다. 베이징 겨울올림픽에 맞춰 이뤄진 2월4일 회담에선 장문의 공동성명을 내놨지만 이번엔 그런 것도 없었다.
푸틴은 중국 눈치를 살피기에 급급했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바뀌지 않는 것이 단 하나 있다. 그것은 러-중 간의 우정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중국 친구들의 균형 잡힌 입장에 감사한다. 이 문제에 관련한 당신들의 의문과 우려를 이해한다. 우리 입장을 자세히 설명하겠다.” 푸틴의 저자세 외교를 보며, 이번 전쟁으로 서구의 엄혹한 경제제재에 내몰린 러시아의 대중 의존도가 결정적으로 높아졌음을 깨달았다. 이는 양국 관계에 구조적 변화를 불러오게 될 것이다. 이대로 가다간 러시아는 중국의 강한 영향력 아래 놓인 이류 국가로 강등될지 모른다.
살벌한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한국의 모습을 들여다본다. 대선 후보 시절 호기롭게 ‘사드 추가 배치’ 공약을 내세웠던 윤석열 대통령은 16일 중국의 권력 3위와 만나 이 문제가 “한-중 관계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보 분야 대표 공약을 집권 넉달 만에 사실상 철회한 것이다. 반대편에 선 미국은 동맹의 이해 따윈 아랑곳없다는 듯 ‘메이드 인 아메리카’ 선전에 여념이 없고, 비판을 감수하며 추진해온 한-일 정상회담 역시 그래서 어떻게 한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미궁에 빠졌다. 자칫하면 한국도 이류 국가로 떨어질 수 있다.
세계는 이제 신냉전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사소해 보이는 정상의 말 한마디에 국가의 명운이 좌우될 수 있다. 궁지에 몰린 푸틴은 그래도 16일 현장에서 진행된 30여분에 이르는 회견에서 기자들의 질문을 메모도 없이 너끈히 받아냈다. 눈빛은 또렷했고 뒷머리에 ‘새집’을 짓고 있지도 않았다. 윤 대통령으로선 첫 유엔 총회 참석인데, 큰 기대는 없으니 부디 일정 중 ‘금주’를 당부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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