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지난달 21일(현지시각) 미국 뉴욕 맨해튼 유엔총회장 인근의 콘퍼런스빌딩에서 낮 12시23분부터 약 30분 동안 대화를 나눴다. 연합뉴스
길윤형 | 국제부장
최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쏟아낸 대일 강경 발언을 비판하려는 칼럼을 쓰려다 마음을 꺾고 말았다. 한·일 혹은 한·미·일 3각 안보협력이나 대일 관계에 관해 그가 쏟아낸 ‘친일국방’ 따위의 극단적 말들에 동의하기 때문은 물론 아니다.
이전 ‘가쓰라-태프트 밀약’ 발언까지 포함해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한참 괴리된 듯한 이 대표의 ‘현실 인식’이 위태로워 보이긴 하지만, 대한민국의 절반 정도 되는 이들은 이 대표의 일본 비판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일지 모른다고 생각을 고쳤다. 지옥 같은 식민지배와 갑작스레 닥친 해방과 골육상잔의 전쟁, 그리고 가혹한 분단으로 이어진 현대사의 아픔을 받아내야 했던 한국인들이 편견 없이 한·일 군사협력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면 왜 일본과 협력해야 하는가. 냉전 해체 흐름이 분명해지던 1980년대 이후 동아시아 정세 변화를 들여다보면, 그 필요성을 절감할 수밖에 없다. 1990년 9월 한-소 수교로 동아시아에 냉전 해체의 바람이 불어오자 북한은 체제붕괴 위협을 느끼게 된다. 김영남 당시 북 외교부장은 남과 수교 사실을 통보하러 온 예두아르트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교장관에게, “우린 이때까지 동맹 관계에 의거했던 일부 무기들도 자체로 마련하는 대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소 수교가 이뤄지면, 생존을 위해 ‘자체 핵 개발’을 하겠다는 위협이었다. 북핵 문제가 동아시아 국제관계를 뒤흔드는 현안으로 부상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곧바로 ‘핵 개발’이란 벼랑으로 치닫지는 않았다.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는 지난달 펴낸 책 <일조교섭 30년사>에서 국난의 위기에 몰린 북한 앞엔 ‘두개의 옵션’이 있었다고 말한다. 하나는 핵 개발을 통한 대결의 길, 또 하나는 미·일과 수교를 통한 개방의 길이었다. 남이 중·소와 수교한다면, 북 역시 미·일과 수교해 그 효과를 상쇄하면 된다. 이른바 ‘교차승인론’이다.
이 아이디어를 일본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남에 호시탐탐 욱일기를 꽂으려 하고 북을 봉쇄해 붕괴시키려는 이들이니 기를 쓰고 반대했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북방외교는 냉전 해체의 바람을 잘 읽은 노태우 전 대통령의 업적이지만, 그 기초를 다진 것은 ‘도살자’ 전두환이었다. 전씨는 1983년 1월 일본 총리로선 처음 한국을 방문한 나카소네 야스히로에게 남이 중·소, 북은 미·일과 서로 국교를 맺는 교차승인이 합리적이라고 설명했다.
그 말에 공감했는지 나카소네는 그해 11월 후야오방 중국 공산당 총서기에게 ‘중국이 한국과 우호적 관계를 바란다’는 의향을 전했고, 1985년 5월 이뤄진 미-일 정상회담에선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에게 “한반도에 평화를 불러오기 위해 교차승인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외교에 문외한인 레이건은 잠시 정회를 요청한 뒤 조지 슐츠 국무장관과 얘기를 나눴다. 이후 돌아와 “당신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다”(!)고 화답했다.
실제 북·일은 1990년 11월부터 국교 정상화를 위한 예비교섭을 시작했다. 12차례 회담이 진행됐지만, 처음엔 1960년대 한·일이 그랬듯 지난 식민지배를 어떻게 평가할지를 둘러싼 역사인식 문제, 나중엔 핵과 일본인 납치 문제로 성과를 내지 못했다. 북핵 문제가 불거지기 전인 1990년대 초 북-일 수교가 이뤄졌다면 동아시아 역사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일본은 1980년대엔 한반도 냉전 완화의 ‘도우미’였고, 교섭이 시작된 뒤엔 애매한 입장으로 변했다가 2002년 9월 납치 문제가 공식화된 뒤엔 노골적인 ‘방해자’가 됐다.
2019년 2월 말 ‘하노이 실패’ 이후 북핵을 둘러싼 살벌한 대치 국면은 장기화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조 바이든 대통령의 대북 정책은 ‘동맹들(한·일)과 조율된 접근을 한다’는 것이다. 그에 더해 미-중 전략경쟁이 첨예해지며,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일본의 전략적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재팬 패싱’은 절대 가능하지 않다. 한반도의 궁극적 평화를 실현하기 위해 일본을 다시 ‘도우미’의 역할로 돌려놓아야 한다. 안정된 한-일 관계를 구축해 북을 저렇게 방치하는 게 결코 일본에 이익이 될 수 없음을 끈질기게 설득하고, 설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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