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하비>(1950)의 한 장면. 옆에 잔이 한 잔 더 놓여 있다.
[크리틱] 김영준 | 전 열린책들 편집이사
내년이 토끼의 해라고 한다. 제임스 스튜어트 주연의 고전영화 <하비>(1950)는 사람 크기의 토끼와 친구가 된 사람의 이야기이다. 이 토끼는 말도 하며 늘 주인공 옆에 붙어 다닌다. 문제는 이 토끼가 다른 사람(관객 포함)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걱정이 된 가족은 주인공을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려 한다. 이후 비슷한 설정을 사용한 영화들(<이웃집 토토로> 등)의 선구가 된 작품이다.
지금의 시각에서는 토끼를 알코올 중독이나 동성애의 은유라고 풀기가 쉬울 듯하다. 필자는 어느 쪽이냐 하면, 주인공의 말 그대로 토끼를 ‘친구’라고 보는 쪽이다. 아무튼 주인공은 하비(토끼)와 처음 만나서 친구가 된 계기를 의사에게 설명하다가, 모든 친구 관계가 그렇듯 어떻게 서로 친구가 됐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시인한다. 친구가 되려면 나중에도 콕 집어서 말할 수 없는 무엇인가가 도와야 한다는 것인데, 보이지 않는 이 토끼는 친구 관계의 신비와 불확실성을 드러내는 상징으로 보인다.
이런 이야기가 오늘날에도 부합하는지 조금 따져보자. 뭔가 변했다. 우리는 친교의 시작과 끝이 온라인에 기록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예컨대 매일 단골로 찾아와 싱거운 댓글이나 주고받던 이들이 어느 날 어색한 몇마디를 교환하더니 서로의 계정에서 자취를 감춘다. 이런 일은 보통 제3자는 모르고 지나갈 일이지만 서로 작심하고 가시 돋친 말을 주고받는 경우엔 모두에게 생중계되기도 한다. 다들 한두번씩은 겪어 본 일이다. 이를 보면 친구 관계의 사적이고 비가시적인 영역이 온라인에 의해 잠식되는 중이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 같다. 다만 잠식의 규모는 가늠이 어렵다. 친구 관계에서 비가시적인 영역의 전체 크기가 미지수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온라인에 공개되며 ‘어떻게 친구가 되었는지’ 일말의 수수께끼도 없는 ‘공적인’ 친교는 궁극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그건 뭐랄까, 별로 만족스러운 게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가시화되는 건 친교 자체가 아니라 서로 주고받은 ‘글(letter)’인데, 글의 교환 역시 새로운 것은 못 된다. 우리는 댓글이나 메시지가 별게 아니라 응답 속도가 빨라진 편지일 뿐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그에 적응하게 됐다. 사실 그 응답 속도조차 조절되고 있는데, 우리는 적절한 타이밍에 대꾸하기 위해 편지를 쓸 때와 똑같은 짓–시간을 재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아마 유일하게 새로운 것은 친구 사이에 글의 교환이 폭증한 점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쓴 루이스 캐럴은 편지 쓰기에 관해 일련의 조언(1890)을 남겼다. “상대방이 기분 나쁠 것 같은 편지는 일단 부치지 말 것. 다음날 내가 받은 편지라고 생각하고 읽어볼 것” “그가 격분한 답장을 보내오면, 못 본 것으로 할 것. 또는 그보다 부드러운 어조로 답장할 것” “의외로 우호적인 답장이 오면, 그보다 더 우호적인 어조로 답할 것” “끝맺는 인사는 최소한 상대방이 한 것만큼은 친절하게” “추신에 의미심장한 구절을 넣지 말 것” 등등.
이게 정말 편지 쓰기에 관한 조언일까? 실은 친구 유지 관리 매뉴얼 아닐까? 지금 문자나 댓글을 쓸 때도 참고가 되는 게 있다고 느껴진다면 우리가 우정에서 기대하는 바는 실제로 변한 게 없는 것이다.
우정의 다이나믹은 꽤 관대한 편이어서 가장 친한 친구의 순위 바꿈이나 연락의 휴지(休止)를 허용한다. 하지만 한번 금이 간 친구 관계는 다시 회복되지 않는다. 연애가 거의 무한정 누리는 사치, 즉 ‘싸움’을 우정은 한번도 감당할 수 없는 것이다. 친구 관계는 별로 질기지 않고, 한번 못 볼 꼴을 보면 바로 해소된다. 그런 오점만 없다면, 10년간 겨울잠을 자던 밍밍한 친교도 나중에 잘 이어지곤 한다.
루이스 캐럴(1832~1898). 위키미디어 코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