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주의를 부추기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20년 5월3일(현지시각) 워싱턴 링컨기념관 에이브러햄 링컨 전 대통령의 동상 앞에서 회견을 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크리틱] 정영목 | 번역가·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
“우리는 모두 자유를 지지한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모두 똑같은 말을 사용해도 똑같은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에게 자유라는 말은 각자가 자기 자신, 또 자기 노동의 산물을 자기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반면 다른 사람에게는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 또 다른 사람의 노동 산물을 자기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이 둘은 자유라는 같은 이름으로 부르지만 서로 다를 뿐 아니라 양립할 수도 없다.”
누가 한 말일까? 마르크스? 아니, 마르크스와 같은 시대에 살았고 그의 글을 읽었으며 편지를 주고받은 일도 있는 링컨이 미국 내전기인 1864년에 한 말이다.
이 말은 노예해방이라는 링컨의 목표가 정치적 결정일 뿐 아니라 자유와 노동이라는 근대 핵심 개념에 대한 깊은 사유와 연결돼 있음을 보여주는데, 물론 링컨은 마르크스와는 달리 임금노동 자체의 폐지를 주장한 적은 없지만, 그럼에도 그의 생각은 당대 가장 혁명적인 사상과 친연성을 드러낸다(마르크스도 미국의 노예해방이 세계 노동운동에 도움이 될 것이라며 링컨의 재선을 축하하는 편지를 보냈다).
이처럼 링컨은 정치적 판단과 심오한 사유를 결합해 나간 드문 정치인(그래서 일찍 죽은 게 아까운 드문 정치인)인데, 실제로 링컨의 자유에 관한 연설은 전쟁 상대인 남부가 내건 자유라는 대의에 대한 그 나름의 정치적·철학적 대응이었다. 미국은 청교도 이주 신화부터 시작해 독립전쟁과 건국을 거치면서 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자신의 존립 근거로 여겼고, 이는 많은 근대인의 칭송을 받기도 했다. 따라서 남부 여러 주가 중앙권력의 속박에 저항하기 위해 연방에서 탈퇴하는 것이야말로 미국적 전통을 따르는, 자유를 위한 투쟁이라는 것이 남부의 논리였고 이런 주장은 노예를 소유하지 않은 많은 미국인의 마음마저 사로잡았다. 그때까지 그들이 알던 자유와 부합하는 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링컨은 자유라는 대의를 남부에 찬탈당하고 싶지 않았다. 10년 전인 1854년에 이미, 노예제 옹호론자들이 “그리워하는 그 완벽한 자유는 다른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자유”라고 일갈한 것을 보면 자유에 대한 그의 사유는 긴 세월 익어온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1864년 연설에서는 이리에게 잡아먹힐 위험에 처한 양을 목자가 구하는 비유를 드는데, 이때 목자는 양에게는 자유를 준 “해방자”가 되고 이리에게는 양을 잡아먹을 자유의 “파괴자”가 된다. 목자는 링컨의 중앙권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그는 여기에서 당시의 통념과는 달리 권력과 자유가 양립할 가능성을 본다. 이는 물론 자기 정당화이지만 동시에 근대를 열었던 자유와는 다른 자유로 나아가는 혁신이기도 했다.
<자유의 함성>에서 제임스 맥퍼슨은 이 대목이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 개념이 탄생한 현장이라고 진단한다(마르크스는 “미국 독립전쟁이 중간계급이 주도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었듯이 반노예 전쟁은 노동계급이 주도하는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라고 그다운 도식으로 정리하지만). 따라서 20세기 말 미국에서 예전 소극적 자유의 소생을 꿈꾸는 자유지상주의자들이 링컨을 주요 공격 대상으로 삼은 것도 놀랄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또 링컨의 사유가 지금도 살아 있음과 동시에 그의 새로운 자유가 여전히 미완의 과제임을 보여준다.
미국 공화당은 이런 과제와 함께 출발했고 링컨은 그 당 출신 첫 대통령이었는데, 얼마 전 같은 당의 트럼프는 그와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여러 사회적 합의와 개념을 흔들어 놓았다. 이 땅에서도 자유, 노동, 민주주의, 법치 등 당연시되던 개념들이 비명을 지르는 중이다. 어쩌면 그것은 달라진 현실을 담아내며 새로운 수준으로 올라설 사유를 촉구하는 개념들의 구조 신호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