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노레 도미에, <간섭마시오(Ne vous y frottez pas!!)>, 1834, 석판화, 캔터 아트 센터
강혜승 I 미술사학자·상명대 초빙교수
예술은 마냥 ‘순수’하지 않다. 어떤 목적과도 결부되지 않은 순수예술이기를 예술은 종종 거부한다. 예술 안에서 전통 또는 정통이란 이름의 규범을 내던지기도 하고, 예술 밖에서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무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복제해 콧수염을 그려 넣는 불경이 전자의 예라면, 풍자화는 후자에 해당한다. 최근 국내 정치와 예술의 경계에서 논란이 됐던 정치풍자화 역시 엄연한 미술 장르로 그 역사는 짧지 않다.
기점은 절대권력을 견제하는 시민 활동이 본격화된 근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치풍자화는 프랑스 대혁명의 유산이었고, 글을 모르는 대중에게 세상의 이면을 비춰준 거울이었다. 우매한 대중과 물질주의를 꼬집기도 했지만 주로 권력을 전유한 지배계급을 풍자했다. 이미지를 통한 권력의 희화화는 정치적 무기로 작동했다. 문맹률이 높던 시절 인쇄 이미지는 주요 소통 수단으로, 석판인쇄술은 대량 복제를 가능하게 했다. 정치풍자화가 언론 구실을 했던 셈이다.
소개할 프랑스 출신 작가 오노레 도미에(1808~1879)는 1830년 주간지를 통해 등단해 동시대를 기록하는 데 치열했다. 1830년은 언론과 출판을 억압하는 시대착오적 왕정에 대항해 자유주의 세력이 봉기했던 혁명의 해였다. 7월 혁명으로 샤를 10세가 물러나고 루이 필립이 왕정을 이어갔지만, 도미에의 눈에 실정은 여전했다. 도미에는 소설 속 거인의 이름을 빌린 작품 <가르강튀아>(1831)에서 군주의 탐욕을 고발하며 권력에 대한 비판의 수위를 높였다.
국왕을 모독한 죄로 징역형을 살기도 한 도미에가 남긴 석판화는 4000점에 이른 것으로 전해진다. 1834년 작 <간섭마시오!!>는 발언의 자유를 침해받지 않겠다는 도미에의 공표로 읽힌다. 건장한 체격의 인쇄공이 ‘언론의 자유’를 글로 새긴 대지를 밟고 섰는데, 불끈 쥔 두 주먹은 저항 의지를 보여주는 듯 굳세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인쇄공 뒤에서 루이 필립은 평소 들고 다니던 우산을 휘두르는 한편 쫓겨난 샤를 10세는 쓰러져 부축을 받고 있다. 언로를 막다가는 샤를 10세꼴이 날 수 있다는 경고의 메시지가 분명하다.
도미에의 현실 비판은 뜨겁고도 냉철했다. 노동환경을 규탄하는 시위가 거셌던 1834년이었다. 견직업이 발달했던 프랑스 남부 거리에서 참극이 벌어졌다. 시위대와 진압군이 대치하던 중 아파트에서 날아든 총알에 군인이 사망하자 군대는 해당 건물을 급습해 잠자던 주민들을 무차별 살해했다. 그 즉시 붓을 든 도미에는 <트랑스노냉 거리, 1834년 4월15일>에서 잠옷 차림으로 쓰러진 일가족을 그렸다. 안식처였을 침실에서 아기와 부모, 할아버지에게 자행된 공권력의 폭력은 가감 없는 묘사로 더욱 참혹했다.
19세기 도미에가 남긴 일련의 정치풍자화는 사회적 시선의 사실주의로 미술사의 한 단락을 차지한다. 시대를 초월해 지금까지 그의 풍자가 유효한 이유는 사회를 향한 날카로운 시선이 증오나 혐오가 아닌 인간애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으로 평가된다. 동시대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는 “그림은 싸움이다. 그러나 증오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위한 것이다”라며 도미에를 향한 존경을 내비쳤다고 한다.
풍자는 자체로 정치적이다. 현상을 다른 관점에서 다시 보게 하려는 정치 기술의 일종으로 설명된다. 정치풍자화 역시 예술 형식을 띠지만 목적이 분명하다. 생산자는 대중에게 관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풍자는 어차피 한쪽의 시선이다. 그 시각이 부조리에 대한 비판인지, 개선하고자 하는 빈정거림인지, 혐오에 찬 부정인지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다만 안목이 필요한데, 도미에를 통해 판단의 잣대를 환기할 수 있다. 증오 말고 사랑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