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징용 피해자와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지난 1월12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강제징용 해법 논의를 위한 공개토론회에서 항의하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편집국에서] 길윤형 | 국제부장
외교부 등이 지난 12일 주최한 ‘강제징용 해법 논의를 위한 공개토론회’에 참석한 뒤 한동안 마음이 편치 못했다. “일본 기업 대신 제3자를 통해 판결금을 받을 수 있다”는 정부안을 두고 강제동원 피해자 유족들이 쏟아낸 격한 말들이 귓속을 맴돌아 적잖이 괴로웠다.
지난해 7~9월 네차례 꼬박꼬박 참석했던 외교부 민관위원회의 결론은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한·일 기업으로부터 기부받아 피해자들에게 대법원 판결로 확정된 배상금을 지급하되, 이를 위해선 피고 기업들의 ‘사과’와 배상 ‘참여’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서민정 외교부 아시아태평양국장은 이날 토론회에서 피고 기업이 “전체 강제징용 문제를 대표해 사과하기는 불가능”하며 “판결금 지급을 이끌어내는 것” 역시 “사실상 어렵다”고 했다. 외교부 담당 국장이 공개 석상에서 사실과 다른 얘기를 할 리는 없으니, 이 발언은 2018년 10월 대법원 확정 판결 이후 4년 넘게 이 문제 해결에 매달려온 한국 정부가 직면해 있는 ‘난감한 상황’을 가감 없이 드러낸 것이라 볼 수밖에 없다. 즉, 우리는 한-일 관계 개선이란 ‘대명제’ 앞에서 대한민국의 최종적 결론인 대법원 판결을 제 손으로 허물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까지 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에 대한 답은 한·미·일 세 나라 정상이 지난해 11월13일 캄보디아에서 공개한 ‘프놈펜 성명’에 담겨 있다. 정상들은 이 성명에서 북한이 핵과 미사일을 통해 “평화와 안보에 중대한 위협”을 가하고 있다며, 이에 대한 “억제를 강화하기 위해 협력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나아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13일 미-일 정상회담에서 일본이 추진하는 ‘적기지 공격 능력’ 보유와 방위비(국방예산) 증액 계획을 “환영한다”고 했고, 두 정상은 공동성명을 통해 성장하는 중국을 “증대하는 도전”이라 규정했다. 상대가 도전한다면, 미국과 그 동맹들은 함께 대응하는 수밖에 없다. 결국 북·중의 위협에 맞서 한·미·일 세 나라가 군사협력을 강화하려면, 한-일 사이 목엣가시처럼 박힌 역사 현안을 조속히 해결해야 한다는 게 미·일, 나아가 윤석열 정부가 내린 하나의 ‘전략적 판단’이 아닌가 한다.
이런 속내를 포장하기 위해 소환되는 개념이 있다. 탈냉전기 한-일 협력의 신시대를 연 1998년 10월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김대중-오부치 선언)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선 공약집에서 “김대중-오부치 선언 2.0 시대를 실현하겠다”고 했고, 지난해 8·15 경축사에서도 “김대중-오부치 선언을 계승해 한-일 관계를 빠르게 회복·발전시키겠다”고 말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주요 업적임이 분명한 이 선언의 독특한 영향력으로 인해 ‘김대중-오부치 선언 2.0’은 어느새 한국의 진보·보수 모두 부정하지 못하는 하나의 ‘단단한 개념’이 되었다.
그러나 생각해본다. 이 선언은 냉전의 해체라는 거대한 시대사적 흐름을 받아들여 양국 관계의 나아갈 바를 재정의한 것이었다. 선언의 정신은 민주화되고 성장한 한국(“오부치 총리는 한국이 비약적인 발전과 민주화를 달성한 데 대해 경의를 표했다”)과 역사를 반성하고 평화헌법을 소중히 하는 일본(“김 대통령은 전후 일본이 평화헌법하에서 수행해온 역할을 높이 평가했다”)이 서로를 인정하며 평화롭게 공존·협력하자는 것이었다. 이는 한-일 관계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중·일은 같은 해 11월 양국 관계의 평화와 발전을 약속한 ‘중-일 공동선언’을 발표했고, 이 거대한 물결 속에서 김대중 대통령(2000년 6월)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2002년 9월)의 역사적인 평양 방문이 이뤄졌다.
조만간 한·일이 새 선언에 합의하게 된다면 그 내용은 양국 간 역사 갈등을 다시 한번 봉인하고, 한·미·일 3각 군사협력을 강화하는 내용으로 구성될 것이다. 신냉전이 시작되려는 엄혹한 시기에 보수 정부가 택한 이 노선에 구태의연한 비판은 삼가려 한다. 다만 이 선언에 김대중-오부치 선언 2.0이란 이름을 가져다 붙일 순 없다. 이 선언은 역사를 봉인하고 협력을 강제했던 1965년 한-일 협정의 진정한 2.0버전이며, 신냉전 시기 양국 협력의 방향을 결정지은 ‘꺼림칙한 변곡점'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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