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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원치 않는 임신’ 그 이상의 이유를 묻지 말자

등록 2023-04-17 18:34수정 2023-04-18 02:37

헌법재판소가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지 4년이 지난 가운데,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 주최로 지난 9일 오후 서울 용산역 광장에서 열린 집회에서 참석자들이 “국가는 임신중지를 건강권으로 보장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헌법재판소가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지 4년이 지난 가운데, ‘모두의 안전한 임신중지를 위한 권리보장 네트워크’ 주최로 지난 9일 오후 서울 용산역 광장에서 열린 집회에서 참석자들이 “국가는 임신중지를 건강권으로 보장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편집국에서] 이정애 | 스페셜콘텐츠부장

“2020년 임신중지 건수가 3만2063건(한국보건사회연구원, 여성 1천명당 임신중지 시술 건수에 실제 15~44살 인구수 곱해 산출한 추정치)이라고? 어디 보자, 그해 태어난 아이들이 27만2300명(통계청)이니… 음, 많긴 많네.”

지난 10일치 <한겨레> 1·9면에 실린 ‘임신중지 ‘합법화’ 4년…후속입법 미비 ‘각자도생’’ 기사를 읽었다며 친구가 이렇게 말했다. 3만여명이면 대체 어느 수준인가 싶어 인터넷에 검색해봤더니, 그해 태어난 아이 수의 9분의 1 수준이더란다.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후 4년이나 지난 지금도 대체입법을 비롯한 후속 조처가 이뤄지지 않고 있는데, 저 많은 여성이 2020년에 제대로 된 병원을 찾아서 안전하게 시술을 받았겠어?” 친구는 기사가 짚은 부분에 주목해줬지만, “많긴 많다”란 말이 ‘쿵’ 하고 마음에 내리꽂혔다.

아니나 다를까. 기사에는 ‘저출생(저출산) 문제로 온 나라가 비상인데 <한겨레>는 지금 낙태를 장려하자는 거냐’란 식의 댓글이 달렸다. 지난해 합계출산율(가임기 여성 1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기대되는 자녀 수)이 역대 최저치인 0.78명까지 떨어졌다는 점을 지적하고, ‘임신중지란 말로 포장해도 결국 태아 살해일 뿐’이란 무시무시한 비판도 이어졌다. 특히 <한겨레> 인터뷰에 응한 최희수·김영서(둘 다 가명)씨가 임신중지를 결정한 이유를 ‘원치 않는 임신’이었다고 설명한 대목에서 악플러들의 ‘발작 버튼’이 눌린 듯했다. ‘대체 강간 외에 원치 않는 임신이라는 게 또 뭐가 있느냐’(강간은 기존 모자보건법에서도 임신중지 시술이 가능하다)는 비아냥, ‘자기가 좋아 즐겨놓고는 국민 세금으로 안전하게 낙태를 허용해달라는 거냐’는 식의 비난이 눈에 띄었다.

젠더팀 이주빈 기자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임신중지 일기를 공개한 김영서씨 인터뷰 기사를 써 왔을 때, 이런 비난이 나오겠거니 예상했다. “독자들이 더 공감할 수 있도록” 원치 않는 임신의 이유가 무엇인지 조금이라도 적어줬으면 좋겠다고 주문했다. “김씨의 인생 계획엔 ‘결혼’과 ‘출산’이 없었다.” 고작 이 한 문장을 더해 왔다. 이 기자는 ‘상처’ 같은 (감상적인) 표현은 쓰지 말았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저 짧은 한 문장 속에 담겼을 구구절절한 사연을 풀어 쓸 수 있다면 기사의 설득력이 더해질 텐데’라고 생각하다가 머리를 크게 한대 맞은 것 같았다. 정부의 저출생 대책 발표 때 “여성들이 결혼·출산을 꺼리는 건, 직장을 잃거나 경력을 안정적으로 지속할 수 없게 될 수도 있다는 공포 때문이라는 걸 정부만 모르는 것 같다”고 떠들었는데, 영서씨에게 구구절절한 ‘다른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강요한 건 아니었을까.

나의 모든 선택이 그러하듯, 영서씨와 희수씨가 임신중지를 선택한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두 사람이 굳이 내밀한 사생활을 낱낱이 드러내며 남들에게 자신의 선택에 대한 이해를 구할 필요는 없다. 그저 사회가 인정한 범위 안에서 제 선택의 결과를 감내하면 된다. 그뿐이다. 헌재도 이미 4년 전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임신한 여성이 임신을 유지 또는 종결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스스로 선택한 인생관·사회관을 바탕으로 깊은 고민을 한 결과를 반영하는 전인적 결정이다. 태아가 모체를 떠난 상태에서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시점(임신 22주 내외)에 도달하기 전이면서, 동시에 임신 유지와 출산 여부에 관한 자기결정권을 행사하기에 충분한 시간이 보장되는 시기까지의 낙태에 대해서는 국가가 생명 보호의 수단과 정도를 달리 정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그러니 악플러들이 손가락질해야 할 대상은 임신중지를 선택한 여성들이 아니다.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과도하게 침해하는 현실을 바로잡으라는 책임을 부여받고도 손 놓고 있는 국회다. 국회는 2년 전 ‘일하는 국회’를 만들겠다며 국회법까지 개정했다. 하지만 상임위원회 전체회의를 매달 두차례 이상, 법안 심사소위원회는 매달 세차례 이상 열겠다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고 있다. 임신중지에 대한 ‘처벌’ 조항을 다룬 형법 개정안(6건)과 임신중지 허용 범위 삭제 등이 담긴 모자보건법 개정안(8건)은 지금도 법제사법위원회에 묶여 있다. 총선까지 남은 시간은 358일, 이 시간도 그대로 날릴 텐가.

hongbyu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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