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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자유당 정권 2인자, 4·19 뒤 가족 함께 비극적 결말을

등록 2023-04-27 18:46수정 2023-04-28 02:36

1896~1960

[나는 역사다] 이기붕

몰락한 양반 집안에서 나고 자랐다.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이승만 파벌에 섰다. 귀국해 사업을 했으나 실패했다. 해방 뒤 이승만이 귀국하자 비서가 됐다. 이승만이 대통령이 되자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다. 1949년 서울시장에 임명됐다(당시는 지방자치제 실시 전이었다). 이기붕. 그는 이승만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마냥 ‘예스맨’은 아니었나 보다. 1951년 국방부 장관이 돼서는 국민방위군 사건 등 군부 비리를 버르집어 관련자를 처벌했다. ‘꼬리’를 잘라 ‘몸통’을 지킨 셈. 하지만 이 일로 잠시 이승만의 눈 밖에 났다는 말도 있다. 이듬해 3월 장관에서 물러났다.

그런데 1953년에 이승만이 정권 2인자 이범석을 쳐냈다. 여당 자유당을 이기붕이 맡았다. 야당과 협상해가며 당을 운영했다. ‘나름 정당정치를 시도했다’는 평가가 있다. 하지만 이승만이 반대하면 여야 협상은 없던 일이 되곤 했다. 이승만에 맞서 자기 정치를 할 사람은 아니었다.

이승만 찬양에 이기붕 부부가 앞장섰다. 부인 박마리아는 1953년 <자유세계의 거성 이승만 대통령>이라는 전기 편찬을 주도했다. 이듬해 이기붕은 이승만 종신 집권을 위한 사사오입 개헌안 통과를 주도했다. 1957년엔 큰아들 강석을 이승만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김동리, 박종화, 모윤숙 같은 문인들은 그런 그를 찬양해, ‘만송족’으로 불렸다(‘만송’은 이기붕의 호다). “나중에 유신 때, 전두환 때 보니까 이 사람들 일부가 또 나서더라.”(서중석)

온화한 사람이라 알려졌지만, 정치 테러에 능했다. “이승만이 물리력으로 경쟁 세력을 제거하는 과정을 보고 체득한 것”이리라.(손연하) 당권을 잡을 때 정치깡패를 동원했고, 장면 부통령 암살미수 사건을 배후 조종했다. 하지만 1958년엔 수하 정치깡패 이정재를 협박해 지역구를 빼앗아 출마했다. 1960년 3월15일 정부통령 선거에서 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공권력을 깡패처럼 동원한 부정선거에 시민들이 항의하며 4·19혁명이 일어났다. 병든 몸으로 시위대를 피해 군부대 등으로 몸을 피했던 그와 가족들은, 이승만 하야 이튿날인 4월28일, 양자로 보냈던 강석의 총에 모두 비극적 끝을 맞았다.

김태권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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