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틱] 정영목 | 번역가·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
오래전 평소 잘 팔리지 않던 서양 고전소설이 어떤 일을 계기로 갑자기 잘 팔리게 되면서 출판사로 항의전화가 빗발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왜 한 인물의 이름을 여러가지로 불러 헛갈리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가령 어떤 인물의 이름이 윌리엄 스미스면 계속 그렇게 가야지, 때에 따라 윌리엄, 빌, 스미스 등으로 바뀌느냐는 불만이었다.
번역자가 그것을 하나로 통일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보다 이런 호칭이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과 대상 사이의 관계를 드러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스미스라는 성으로 부르는 사람과 빌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사람 각각과 그 인물의 친소는 같을 수 없다. 그런데 인물끼리는 그렇다 치고 서술자마저 자기 인물을 계속 바꿔 부르는 건 뭘까. 사실 이때 번역자는 긴장하는데, 이건 서술자가 그 인물을 가령 “빌”이라고 부르는 사람의 시선으로 보고 있다는 표지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세심한 작가는 이때 시선을 빌린 사람의 입까지 빌려, 언어가 달라지기도 한다.
영화에서 일반 관객은 화면에 몰입해 연출자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지, 카메라가 어디서 어떻게 비추는지 의식하지 않는다. 소설도 비슷하다. 하지만 번역자는 독자의 그런 몰입을 위해서라도 카메라, 즉 시점의 움직임 자체를 번역해야 한다. 단지 움직임만이 아니라 어떤 카메라를 사용하는가도 중요 관심사다. 근대 사실주의 소설은 언문일치체의 발명과 더불어 소설 언어의 표준 렌즈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 후, 미술이 표준 원근법적 재현에서 벗어나듯 소설도 다른 렌즈를 찾게 된다. 접사 렌즈를 바짝 들이대거나, 심지어 내시경을 이용해 인물의 의식 안으로 파고들기도 한다.
실제로 내시경 언어 달인들의 솜씨를 보면 솔기 없이 외부로부터 의식 내부로 들어갔다 다시 나오는, 돌고래 같은 말의 흐름에 감탄하게 된다. 서술자와 인물의 두 목소리가 섞이면서 느껴지는 풍요로운 입체감도 일품이다. 그러나 감탄은 읽을 때뿐, 번역할 때는 곤혹스럽기 짝이 없다. 김천혜는 <소설 구조의 이론>에서 이런 내시경의 언어가 자유간접화법, 즉 “인물의 내면의 독백을 간접으로 표현하는 표현법”이라고 하면서, 우리말에는 이것이 “아직 형태를 갖추어 정착되어 있지” 않으며, 따라서 “서구어에 비해 우리말에 표현법이 하나 모자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런 화법을 사용한 표현은 “우리말로 번역이 잘되지 않는다”고 덧붙인다.
약간 위로를 받으면서도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 화법을 애용했다는 버지니아 울프는 다 어떻게 번역되었을까? 게다가 이 화법은 지금은 소설만이 아니라 심지어 논문에서도 눈에 띌 만큼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사실 “번역이 잘되지” 않을 뿐이지 어떻게든 되기는 한다. 영어의 미래완료진행 같은 시제가 우리말에 없다 해서 그걸 이해하고 표현해내지 못하지는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도 “형태를 갖추어 정착되어 있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형태를 갖추어 정착시키면 되지 않을까? “간접적 내적 독백은” 구어에서 사용되는 것을 소설에 도입한 것이 아니고 소설 표현을 위해 의도적으로 개발한 문어다. 불과 “백수십년 전” 일이다. 우리의 언문일치체가 인공물이었듯이, 내시경의 언어 또한 인공적으로 만들어질 가능성은 열려 있는 셈이다. 물론 김천혜도 말하듯이, 그런 내시경 화법이 의식을 정확하게 재현하는가, 그에 앞서 의식에서 언어의 비중과 역할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논란이 많은 문제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로, 우리 작가들에게 지금 이런 언어가 절실한가? 절실하다면 만들어질 것이고, 어떤 형태이든 정착되어 언문일치체처럼 우리 텍스트를 장악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번역자는 오늘도 우리 작가의 언어를 살피고 또 훔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