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영 한국노총 금속노련 사무처장이 지난달 31일 새벽 전남 광양시 포스코 광양제철소 앞 농성장에서 경찰에 진압당하고 있다. 한국노총 제공
[편집국에서] 전종휘 | 사회정책부장
1991년 4월26일 밤이었다. “대학생이 대낮에 전투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죽었다”는 얘기가 들렸다. 대학 영자신문사 학생기자로서 현장에 가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영안실 앞엔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 소속 사수대 수십명이 도열해 혹시라도 모를 군사정부의 주검 탈취에 대비했다. 경찰이 사정없이 쏘아댄 최루탄 탓에 거리엔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로 매캐한 냄새가 가득했다.
최루탄의 화학물질보다 시민을 더 질식시키는 건 모든 집회와 시위를 틀어막는 마지막 군사정부의 억압이었다. “언론·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과 집회·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아니한다”는 헌법 조문(21조 2항)은 쓰레기통에 처박힌 지 오래였다. 등록금 인상 반대 등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던 명지대생 강경대가 경찰 폭력에 목숨을 앗기는 시국이었다.
암울한 시대였다. 한진중공업 노동조합 박창수 위원장이 의문의 죽임을 당하고, 경찰이 부검을 명분으로 병원 영안실 벽에 구멍을 내어 그의 주검을 가져가는 일도 벌어졌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열기를 업고 세를 확장하던 노동운동 세력과 학생운동 세력이 정부의 섬멸 대상이 됐다.
학생과 시민이 잇따라 스스로 절명하는 분신 정국이 이어졌다. 날마다 수십만에 달하는 학생과 시민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해체 민자당(민주자유당), 타도 노태우”를 외쳤다. 폭압 정치의 정점은 5월에 일어난 그 유명한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이다. 검경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전국민족민주연합(전민련) 김기설 사회부장의 유서를 같은 단체 강기훈 총무부장이 대신 써줬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웠다. ‘운동권은 목적 달성을 위해선 죽음마저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패륜 집단’이란 극악한 프레임을 씌우기 위한 것이다.
당시 이런 보도에 가장 적극적인 매체 중 하나가 <조선일보>였다. 생명사상에 심취해 있던 김지하 시인이 이 신문 사회면 머리기사로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라는 제목의 기고를 한 건 그래서 더욱 부적절했다. 동료의 죽음을 방조했다는 누명을 쓴 강기훈씨가 2015년 재심에서 결국 무죄를 선고받기까지 겪은 24년 고통의 세월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지난 5월 건설 노동자 양회동씨 분신과 사망을 앞뒤로 한국 사회에서 벌어진 일들은 32년 전 학생기자 시절의 기억을 끊임없이 불러냈다. 검경은 건설노조를 폭력배 취급하며 잡도리한다. 양씨는 유서에서 산별협약을 맺기 위해 고군분투한 자신의 행동에 공갈과 업무방해 혐의를 뒤집어씌우는 수사 행태에 강한 분노를 표시했다. 여기에 <월간조선>이 유서대필 의혹 보도로 우울한 데자뷔에 방점을 찍었다. 분노한 건설노조가 1박2일 집회를 열자 정부는 야간집회를 금지하겠다며 다시 헌법에 도전장을 냈다. 포스코 광양제철소 비정규직 투쟁에 힘을 보태겠다며 망루에 오른 김준영 한국노총 금속노련 사무처장은 경찰 곤봉에 두들겨 맞아 머리에 피를 흘리며 끌려 내려와 병원에서 구속됐다.
노태우 정부가 폭압 정치를 펼친 건 정권 차원의 자신감 부족 탓이 컸다. 육사 11기 동기인 전두환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키고 광주를 유혈 진압한 뒤 둘이 잇따라 대통령 권좌에 오른 탓에 정권의 정당성이 취약했다. 정치적으론 여소야대의 수세에 몰린데다 경제는 3저(금리·유가·달러) 호황의 단물이 본격적으로 빠지고 치솟는 물가에 민심은 흉흉했다. 결국 익숙한 육사 출신 하나회 인맥에 기대고 검경을 이용해 반대세력의 목소리가 새어 나오지 못하게 틀어막는 것 빼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시민의 자유를 억압하고 노조 등 정부에 비우호적인 세력 탄압에 나선 현 정부의 모습에서도 자신감 부족이 읽힌다. 내적 자아가 충만한 정부라면 ‘노조 부패’니 ‘건폭’이니 끊임없이 부정적 프레임을 생산하고 전선을 그으려 하진 않을 것이다.
노태우 정부 때와는 달리 육사 대신 검사 출신을 중용하는 게 차이랄까. 또 있다. 정권의 정당성 자체는 그때보다 훨씬 강하다. 그런데도 없는 적을 자꾸 만들려 애쓰고 여기저기 대치 전선을 형성하는 모습에선 그들의 불안감마저 읽힌다. 그러는 사이 노동시장 이중구조 개선이라는 이 정부가 주장한 노동개혁 목표 달성은 점점 멀어져 가고 있다. 모두를 적으로 돌리고 할 수 있는 개혁이란 이 세상에 없다.
symbio@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