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다] 이휘소(1935~1977)
“어처구니없다. 우선 전공이 다르다. 이휘소는 입자 물리학자이고, 핵무기는 수백명의 핵공학자와 기술자가 필요하다.”
물리학자 강경식은 말했다. 그렇다. 이휘소는 핵무기를 만들지 않았다. 이휘소는 공대에 다니다가 물리학에 반했다. 외국 학자가 쓴 양자역학 교과서의 잘못을 찾아 저자에게 편지를 쓰고 답장도 받았다. 당시 한국 대학은 전공을 바꾸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시험을 보고 장학금을 받아 미국 마이애미대학에 편입해 물리학을 공부했다. 미국 교수들은 이휘소의 재능에 감탄하여 피츠버그대학으로, 펜실베이니아대학으로 추천을 해줬다. 1961년 이휘소가 박사학위를 받자 미국 여러 대학과 연구소들이 그를 데려가려고 경쟁했다.
“세상에서 가장 신나는 일이 물리학 연구”라고 이휘소는 말했다. 젊은 시절 별명은 “팬티가 썩은 사람”, 앉아서 연구만 했기 때문이다. 연구할 때면 “딴 세상 사람처럼 보였다”고 어머니는 말했다. “비록 자신은 (일찍 세상을 떠나) 노벨상을 못 받았지만 이휘소의 연구와 직접·간접으로 관련하여 (1976년부터 2004년까지) 여러 사람이 노벨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이휘소 평전>을 쓴 제자 강주상은 말했다.
이휘소는 박정희와 엮이기를 원치 않았다. “핵무기는 없어져야 한다. 특히 독재체제 개발도상국의 핵무기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한국 학생을 위해 여름학교를 기획했다가 취소한 일도 있다. “내가 한국의 현 정권과 억압 정책을 지지하는 것으로 비칠까 걱정된다. (한국에서의) 하계 대학원 사업은 수락하지 않을 결심이다. 한국 국민의 장래를 걱정하는 한 사람으로서 택할 유일한 길”이라는 편지를 1972년에 썼다. 핵무기를 만들지 않았다는 또 하나의 근거다.
1977년 6월16일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십수년이 지나 ‘이휘소가 박정희와 손잡고 핵무기를 개발한다’는 소설이 나왔다. 유족은 명예훼손으로 작가를 고소했다. ‘소설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소설 덕분에 더 유명해졌으므로 명예훼손은 아니’라는 기묘한 판결이 나왔다. 하지만 학계에서 존경받던 세계적 학자에게 살상무기 개발이 명예가 될까.
김태권 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