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다] 구스타프 클림트 (1862~1918)
동시대 사람들은 클림트의 작품을 어떻게 보았을까? 전통적인 미술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새로운 미술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1862년 7월14일 태어난 클림트는 점묘로 유명한 조르주 쇠라(1859년생), 추상화의 대가 바실리 칸딘스키(1866년생)와 동년배다. “국제적인 맥락에서 보면 클림트는 최첨단도 선구자도 아니었다.” 클림트에 관한 책을 쓴 패트릭 베이드의 평이다.
클림트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살았다. 당시 빈 사람들 사이에서 클림트의 작품은 평가가 엇갈렸다.
기성 미술계는 그를 싫어했다. 클림트와 젊은 작가들의 작품은 미술가협회에서 받아주지 않아 전시도 따로 해야 했을 정도. 그래서 이들은 ‘빈 분리파’라는 이름을 얻었다. 오랫동안 작업한 <학부 회화>라는 작품이 대학교수들의 비판을 받은 뒤, 클림트는 공공미술 프로젝트도 그만뒀다.
또래 예술가들은 그의 작품을 좋아했다. 1902년 작곡가이자 지휘자였던 구스타프 말러가 연주자들과 전시장을 찾아 베토벤 <합창> 교향곡의 합창 부분을 연주했다.(구스타프 말러의 부인 알마 말러는 앞서 클림트의 연인이었다. 결혼 전 이름은 알마 쉰들러)
부유한 후원자들 역시 그가 그린 초상화를 원했다. ‘철강 재벌’로 알려진 사업가 카를 비트겐슈타인(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이 그의 아들이다)도 그의 후원자였고, 딸의 초상화도 그렸다.
클림트는 1918년 세상을 떠났다. 후원자였던 레더러 가문이 많은 작품을 사들였다. 1938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점령한 뒤 레더러 집안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시달림을 당했다. 엘리자베트 레더러는 자기 어머니가 클림트와 내연의 관계였고 자기가 클림트의 딸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래서라기보다, 아버지가 유대인이 아니라고 주장해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였다. 클림트의 적지 않은 작품을 나치가 빼앗아 이곳저곳에 챙겨뒀다. 그중 한 곳인 이멘도르프성은 전쟁 막바지인 1945년 불탔다. 레더러 가문이 빼앗긴 작품들도 이때 불에 타 사라졌다고 한다.
김태권 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