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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여행후기를 여행한 후기

등록 2023-09-18 19:06수정 2023-09-19 02:38

[뉴스룸에서] 박현철 | 서비스총괄

한겨레는 지금 2023년 수습사원을 뽑는 중입니다. 저는 2000년대 중반 한겨레 수습기자로 입사했습니다. 그동안 수습사원을 뽑는 과정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2023년 지원자들은 각자의 공간에서 각자의 노트북과 스마트폰을 켜고 필기시험을 봤습니다. 볼펜과 ‘화이트’로 무장하고 시험장에 모여 A4 또는 A3 용지에 한 글자 한 글자 꾹꾹 눌러쓰던 장면은 아마 앞으로 볼 수 없을 겁니다.

20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변하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바로 시험 과목인데요. 이번 한겨레 수습기자 필기시험은 1교시 종합교양, 2교시 작문, 3교시 논문이었습니다. 제가 시험 볼 때와 같습니다. ‘다음 중 참나무가 아닌 것을 고르시오’ 같은 문제(제가 입사할 때였습니다)는 이제 없지만, 꽤나 까다로운 객관식 교양시험도 여전합니다.

저는 이번 채용 과정에서 수습기자 필기시험 채점을 맡아 호사를 누렸습니다. 호사라니, 궁금하시죠? 호사, 호화롭게 사치함. 잘못 쓴 말이 아닙니다. 2교시 작문 과제 덕분입니다.

“여행을 앞둔 지인을 독자로 삼아, 가장 기억에 남는 자신의 여행 경험을 1200자 안팎의 글로 쓰시오.(여행에 대한 묘사와 그 여행이 가장 기억에 남는 이유를 포함할 것)”

100편이 넘는 글을 꼼꼼히 읽어야 했습니다. 공감을 불러일으키는지, 맞춤법을 따르지 않거나 상투적인 표현은 없는지, 제시한 조건을 글에 담았는지 같은 평가 요소에 따라 점수를 매겼는데요. 제한된 시간 안에 글을 써내야 했던 지원자들에겐 죄송하지만, 지루하거나 힘겨울 틈이 없었습니다. 여행 목적지도 여행에서 느낀 감흥도 독자로 삼은 지인도 지원자 수만큼 제각각, 알록달록했기 때문입니다.

첫 여행을 앞둔 어머니에게 띄우는 편지글들이 눈에 띄었는데요. 내게 평생 퍼주기만 하던 존재에게 뭔가 알려줄 수 있다는 자부심이 묻어나는 글을 보면 제가 대신 뿌듯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여행은 경험해보지 않으면 그 실체를 온전히 알 수 없는 무엇”이라고, 언제 이렇게 어머니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얘길 할 수 있을까요?

지원자 개인을 특정할 수 있는 정보는 평가 전이든 후든 평가하는 이들에게 제공되지 않았습니다. 공정한 평가를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지원자들에게 제공되는 정보 역시 부족할 수밖에 없어 안타깝긴 합니다. 논문이나 작문의 ‘피드백’ 얘기입니다. 합격, 불합격 여부만 알 수 있을 뿐 어느 대목에서 감점을 했는지, 어떤 점이 돋보였는지를 지원자들에게 전할 방법이 마땅치 않습니다. 약 20년 전 언론사 응시생이던 저는 그런 피드백이 너무 간절했거든요. 입장이 바뀌었는데도 간절함은 여전합니다.

작문은 무엇보다 얼마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지가 평가의 핵심 요소였습니다. 공감을 일으키는 글엔 여러 특성이 있을 텐데요. 만약 같은 내용을 대화로 전한다면 상대방 반응을 살펴가며 내용이든 형식이든 조정을 할 텐데, 글은 그게 불가능합니다.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 때론 적절한 비유를 섞어 여행 속으로 독자를 끌어들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지원자들의 작문을 채점한 지 꽤 시간이 흘렀지만 몇몇 여행은 지금도 제 머릿속에 아련하게나마 남아 있습니다.

저는 특히 ‘제시한 조건을 글에 잘 담았는지’를 눈여겨봤습니다. ‘독자가 있는 글’이 키워드였습니다. 반드시 편지 형식일 필요는 없습니다. 대신 이 글을 읽는 사람은 누구이고, 여행을 앞둔 그에게 나의 여행 경험 중 어떤 대목이 가장 ‘영양가’가 있을지를 고민한 흔적이 있는 글에 좀 더 나은 점수를 주려 했습니다. 앞으로 기자라는 이름으로 쓰게 될 수많은 글(기사) 역시 그렇게 써야 할 테니까요.

이상은 물론 모든 평가자의 공통된 ‘공식 의견’은 아님을 밝힙니다. 소중한 여행 경험을 나누었으니 고맙게 잘 읽었다는 답장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습니다. 사실 한겨레 입사시험에 지원한 분들은 이유가 무엇이든 한겨레 콘텐츠를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소비한 고관여 독자이자 고객입니다. 원하시면 평생 한겨레를 평가하고 채점하실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모든 지원자 여러분의 행운을 빕니다.

fkco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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