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왼쪽)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달 13일 러시아 아무르주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뉴스룸에서] 길윤형|국제부장
“저는 분명히 기분이 상했고, 이를 각하에게 숨기고 싶지 않습니다. 분명히 저는 정말로 기분이 상했습니다.”
저명한 미국 언론인 밥 우드워드가 2020년 펴낸 저서 ‘분노’에서 “실망한 친구 혹은 연인”의 편지 같았다고 묘사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친서가 작성된 때는 2019년 8월5일이었다. 이 편지에서 김 위원장은 도널드 트럼프 당시 대통령에게 엿새 뒤인 11일 개시되는 한-미 연합 지휘소 훈련을 두고 강한 불만을 터뜨리며 자신이 상심했음을 거듭 강조했다. 6개월 전인 2019년 2월 말 ‘하노이 노딜’에 이은 그해 8월 한-미 연합훈련 재개의 충격으로 북-미 대화는 사실상 파탄에 이르게 된다.
이후 한반도 정세가 어떻게 흘러왔는지는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북한은 “미국과 대치는 장기성을 띠게 되어 있다”면서 이른바 ‘5대 전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는 등 핵무장 강화의 길로 나섰다. 그리고 ‘마지막 편지’ 이후 4년여 뒤인 지난달 13일 김 위원장은 전세계를 경악하게 만드는 ‘위험한 모험’에 나섰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미국과 유럽이 주도하는 국제사회의 ‘공적’이 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에 나선 것이다.
북한을 오랫동안 관찰해온 시그프리드 헤커 박사는 지난달 12일 ‘포린폴리시’ 기고에서 김 위원장의 대러 접근은 단순히 “전술적이거나 사정이 다급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미국과 관계를 개선해보려는 지난 30년간의 노력을 포기하는 근본적인 정책 변화의 결과”라고 설명했다. 이를 보여주듯 김 위원장은 푸틴 대통령에게 “우리는 시종일관 러시아 정부 그리고 대통령께서 취하시는 모든 조처에 무조건적인 지지를 표명해왔다” “앞으로도 러시아와 함께 있을 것임을 확언한다”고 말했다.
한국의 다음 수는 뭐가 되어야 할까. 북-러 합의 내용이 공개되지 않아 다양한 의견이 백가쟁명식으로 쏟아지는 중이다. 진보 쪽에선 “북한이 국제 무대에서 만만치 않은 행위자로 등장하고 있다”(정욱식 한겨레평화연구소장)며 “대미 맹종과 맹목적 대북 적대”로 구성된 ‘윤석열 외교’를 수정해야 한다(박노자 오슬로대 교수)고 요구하고 있다. 보수에선 “대우크라이나 살상무기 불제공 원칙의 응당 수정”은 물론 “남북 군사합의와 남북 비핵화 공동선언의 폐기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이용준 세종연구소 이사장)는 과격한 주장을 내놓는 중이다. 진보의 제언이 현재 국제 정세를 좀 더 냉정하게 파악한 의견으로 보이지만 윤석열 정부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보내라’는 보수의 제언을 그대로 시행하기도 곤란하다. 냉정히 생각할 때 향후 이뤄지게 될 북-러의 전술적·전략적 협력은 한국이 어찌해볼 수 없는 고통스러운 ‘외교적 상수’가 되었다.
이 충격을 그나마 최소화할 수 있는 방책은 ‘중국과 협력 강화’일 수밖에 없다. 중국은 다행히도 최근 북-러 접근에 선을 긋고 있다. 왕이 외교부장은 지난달 20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과 만나 “중·러는 세계의 발전과 진보를 추동하는 데 중요한 책임이 있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라고 말했다. 북한에 위성기술 등을 제공할 수 있다는 취지로 언급한 러시아에 책임 있게 행동을 할 것을 에둘러 요구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시진핑 국가주석도 지난달 23일 한덕수 총리와 만남에서 “중국은 한국에 대한 선린우호정책을 견지할 것”이라고 말했다. 북-러 접근에 올라타지 않겠다는 뜻을 비교적 명확한 언어로 전해준 셈이다.
제19회 아시안게임 개막식 참석을 위해 중국을 방문한 한덕수 국무총리가 지난달 23일 오후(현지시각) 중국 항저우 저장성 항저우 시후 국빈관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을 만나 악수하고 있다. 국무총리실 제공
윤석열 대통령은 집권 이후 한·미·일 3각 협력 심화에 집중하며 중국과 대립해왔다. 지난 4월 말 로이터 통신 인터뷰에선 중국이 중시하는 ‘하나의 중국’을 무시하는 듯한 발언으로 양국 관계를 파탄 직전에 이르게 했다. 북-러 접근은 지역 정세를 뒤흔드는 지정학적 충격이라 불러야 한다. 한-중 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게 이전보다 더 큰 우리의 ‘사활적 이익’이 되었다. 게다가 내년 11월 미국 대선 결과를 예측하기 쉽지 않다. 미-중의 ‘전략 경쟁’ 판에 철부지 소총수처럼 나서선 곤란하다. 다시 이 판을 잘못 읽어 중국과 관계를 망가뜨리면, 윤 대통령은 한국 외교를 망친 인물로 역사에 기록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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