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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혁명의 이름으로 방화, 살인… 독일 적군파의 대표자

등록 2023-10-12 18:57수정 2023-10-13 02:41

[나는 역사다] 울리케 마인호프 (1934~1976)

학생운동을 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저널리스트가 되어 월간 ‘콩크레트’라는 좌파 매체에서 일했다. 같은 직장에서 일하던 클라우스 뢸과 결혼해 쌍둥이 딸을 뒀다.

1967년 ‘콩크레트’에 이란의 독재자 팔레비를 비판하는 기사를 썼다. 독일 대학생들은 팔레비의 독일 방문에 항의하며 거리싸움을 벌였다. 경찰이 학생운동가 베노 오네조르크의 뒤통수를 권총으로 쏴 살해했다. 독일 68운동의 시작이었다. 베트남전 반대 운동이 독일 지식인 사회에 휘몰아쳤고 마인호프는 갈수록 과격해졌다. 콩크레트와 결별하고 남편과 헤어졌다.

1970년 마인호프는 구속 중이던 과격파 지도자 안드레아스 바더를 인터뷰하겠다고 정부에 요청했다. 바더는 인터뷰 장소인 도서관에 도착했다. 무장 괴한이 들이닥쳐 바더를 탈출시켰다. 애꿎은 사람이 총에 맞아 크게 다쳤다. 바더 탈출 작전에 연루된 마인호프 역시 쫓기는 신세가 된다.

바더와 마인호프는 독일 적군파를 대표하는 이름이 됐다. 은행 강도며 방화, 살인 등 수백건의 테러를 저질렀다. 스스로 ‘도시 게릴라’라고 주장했으나, 평범한 사람의 마음을 얻는 데는 실패했다.

1972년 시민의 신고로 마인호프는 체포됐다. 여러가지 사건으로 재판을 받다가 1976년 5월9일 감옥에서 숨졌다. 정부는 자살이라 발표했으나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수천명이 마인호프의 죽음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가 암살당했다는 주장이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1977년 10월13일, 팔레스타인해방인민전선이 독일 루프트한자 181편 비행기를 납치해 소말리아로 끌고 갔다. 이들의 요구 가운데 하나가 독일 적군파 지도자의 석방이었다. 마인호프의 동료들 말이다. 10월18일 테러 진압 작전으로 납치범들은 사살당했고, 독일 감옥에 있던 바더와 적군파 지도자들도 이날 밤 죽음을 맞았다. 정부는 자살이라 발표했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음모론을 폈다. 1990년 독일이 통일됐고 1991년 소련이 무너졌다. 1998년 4월 적군파는 공식적으로 해산을 선언했다.

김태권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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