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시내 대형마트 신선식품 판매대 모습. 연합뉴스
[크리틱] 임우진|프랑스 국립 건축가
자동차가 발명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도시에 살고 있을까. 빨라야 시간당 4㎞ 걷는 보폭으로 2시간은 족히 걸릴 용산에서 역삼까지 매일 출퇴근할 리는 만무하니, 차가 없었으면 강남이 개발되었을 리도 분당, 일산 같은 신도시도 없었을 것이다. 사람보다 몇십배는 빨리 달리는 자동차 덕에 땅값 싼 시외에 집을 싸게 지어 많은 사람이 집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고 일자리가 몰려있는 도심까지 지리적 거리를 시간적 거리로 치환할 수 있었다.(그 ‘덕분에’ 시 외곽이라도 집주인이 될 수 있었다는 사실과, 그 ‘때문에’ 출퇴근 때 교통지옥의 굴레에 빠졌다는 사실 사이에서 반론이 이어지겠지만 여기서는 논외로 하자.)
그런데 자동차만큼 자주 회자하지 않지만 그 못지않게 우리 도시의 모습을 바꿔놓은 발명품이 있다. 바로 냉장고다. 자동차와 냉장고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성능개선은 물론이고 대형화, 다양화되어 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번 ‘업그레이드’하면 사용자 스스로 ‘다운그레이드’하기 힘든 대표적인 물건들이기도 하다.
1970~80년대 대량으로 지어지기 시작한 아파트에는, 당시 주로 시판되던 문짝 하나짜리 냉장고 기준으로 주방 크기가 정해졌다. 그러다 90년대 냉동/냉장실이 구분된 냉장고가 주력이 되며 주방이 비좁아지기 시작하더니, 2000년대 거의 두배는 커진 양문형 냉장고가 도입되고 게다가 김치냉장고까지 새로이 등장하자 기존 아파트는 더는 변화한 라이프 스타일을 감당하기 어려워진다. 예전에 지어진 아파트는 건설 당시 고려된 크기보다 2~3배 커진 냉장고를 수용하느라 불법을 감수하고 발코니를 확장해야 했고 그것도 모자라 복도나 다용도실, 심지어는 거실 한구석을 냉장고에 내줘야 했다. 신규로 건설되는 아파트는 대형화, 다양화된 냉장고를 위해 아예 대놓고 발코니 확장을 전제로 평면을 짜고 실내공간을 넓히기 위한 갖가지 편법을 동원한다.
편한 자동차와 커진 냉장고 덕에 21세기 한국인은 근처 대형마트 또는 온라인 상점에서 대형 ‘묶음상품’들을 구매해 냉장고 구석구석 재워 넣는다. 대부분 가정 냉장고에는 생수 몇병은 기본, 온갖 주류, 음료, 반찬류, 고기, 생선, 채소, 과일로 빈틈이 없을 정도다. 몇달 넘도록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음료수병, 몇년 넘도록 냉동실 구석 안쪽에 처박혀 잊힌 고기 조각도 흔하다. 몇년 전세살이가 끝나고 이사 갈 때에서야 비로소 냉장고 속 오래된 음식의 위치가 쓰레기봉투로 바뀐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문짝 하나짜리가 주였던 70~80년대와 대형 양문형 냉장고가 보편화한 오늘날, 냉장고의 모습 너머 도시적으로 무엇이 달라졌을까. 그때는 대형마트 같은 것이 없었으니 집 앞 동네가게에서 매일매일 찬거리를 샀다. 누구네 가게 가서 두부 한모 사 오라는 엄마의 심부름이 일상적이었고 필요하면 달걀 한알도 사 올 수 있었다. 그것도 신선한 것으로만 말이다. 말하자면 당시 동네식품점이 지금 우리 아파트의 ‘공동 냉장고’ 역할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오늘 우리가 동네슈퍼보다 싸다는 이유로 뭉텅이로 주워 담는 대형마트의 ‘묶음상품’ 뒤에는, 결국 반은 버려질 음식물을 보관하기 위해 커진 냉장고, 그것들을 몇달 동안 저온 상태로 보관하기 위한 전기, 비대해진 냉장고를 위해 함께 불어난 아파트, 그리고 그것을 실어 오기 위한 자동차와 주차공간의 가격이 아래에 은밀히 숨어있다. 뭐가 싸다는 것인가. 생각을 바꾸면 집이 넓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