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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악수만 나눠도 칭찬받는 대통령

등록 2023-11-02 09:00수정 2023-11-02 11:43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1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2024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마치고 퇴장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31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2024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마치고 퇴장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뉴스룸에서] 황준범 | 정치부장

윤석열 대통령이 칭찬받는 게 얼마나 쉬운 일인지, 그저께 국회 시정연설이 보여줬다.

새해 예산안을 국민 앞에 설명하고 국회에 협조를 구하는 자리이니, 애초부터 연설에 전 정부 탓이나 비교, 이념 공세 따위는 들어갈 필요가 없다. 그럼에도 윤 대통령 연설에서 이런 내용이 ‘빠졌다’는 게 뉴스가 된다. 행정부 수반이 입법부에 협조를 요청하러 간 것이니 야당 대표와 의원들에게 악수를 청하고, 정중하게 부탁하고, 경청하는 것도 당연하다. 이런 행동을 윤 대통령이 하니 신선한 장면이 되고, ‘대통령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는 호평이 쏟아진다.

삼권분립 민주주의 국가에서 지극히 정상적이라 할 이런 모습을 보기가 그동안 너무 어려웠다. 윤 대통령은 칭찬받았다고 기뻐할 게 아니라, 자신이 취임 뒤 지난 1년 반 동안 얼마나 적대적 언사와 행동으로 분란과 갈등을 부추기고, 의회를 무시하는 대결 정치로 소중한 시간을 흘려보냈는지, 국민이 갈망해온 장면들이 무엇이었을지 되새겨야 한다.

시정연설을 두고 여권에서는 “윤 대통령에게서 변화의 신호를 봤다”며 기대 찬 반응이 나온다.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패배 뒤 “국민은 늘, 무조건 옳다”고 한 윤 대통령은 정말로 변하는 걸까.

간단해 보여도 좀처럼 하지 않았던 행동을 대통령이 했으니, 변화의 첫발은 내디딘 것 아니겠냐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사람 안 변한다”며 의구심을 버리지 못하는 이들이 여권 안에도 많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취임 첫해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시위에 자세를 낮추는 듯했다가 전 정권 관련 수사와 비판세력 사찰에 나선 일, 박근혜 정부가 세월호 참사 뒤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으로 반격에 나선 일 등이 그 사례로 제시된다. 윤 대통령도 지난해 여름 지지율 20%대를 마주한 뒤 소통·협치보다는 사정통치와 이념몰이 강화에 앞장서온 장본인이다. 보궐선거 원인 제공자를 대법원 유죄 확정 석달 만에 사면해 재공천의 길을 터줌으로써 오만에 대한 민심의 심판을 자초한 윤 대통령이 “내 책임”부터 명확하게 말하지 않는 점부터 ‘변화’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한다.

지난 29일 이태원참사 1주기 때 시민추모대회가 열린 서울광장이 아니라 서울 영암교회를 찾아가 여당·정부·대통령실 고위 인사들과 모여 따로 추도예배를 본 윤 대통령의 모습은 그가 말한 “차분한 변화”의 한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옹색하고 어정쩡한 풍경이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희생자를 추모하고 애도하는 마음은 전국 그리고 세계 어디서나 다를 것이 없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굳이 교회엔 왜 갔나. 윤 대통령이 서울광장 단상에 올라 희생자와 유가족에게 따뜻한 사과와 위로를 건넸다면, 국회 가서 야당 대표나 의원들에게 악수를 청하는 장면보다 100배, 1000배의 감동을 줬을 것이다.

모범 답안들은 진작부터 나와 있었다. 진영을 초월해 여러 사람이 공통으로 윤 대통령에게 내놓는 주문은 국정 기조와 스타일 전환, 대통령실-여당의 수직적 관계 탈피, 이념 공세 중단과 민생 우선 정치, 야당·언론·비판세력과의 소통 강화 등이다. 집권세력 주류가 총력을 쏟아부어 내쳤던 유승민·이준석을 끌어안을지, 친윤·검사 공천에 집착하지 않겠다고 밝힐 수 있을지도 관전 포인트다. 국민의힘이 인요한 혁신위원회를 띄워 쇄신 분위기를 잡아가고 있지만, 윤 대통령의 변화가 동반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다.

윤 대통령은 시정연설 직후 야당 의원들로부터 “양평고속도로 의혹에 대통령이 종지부를 찍어달라” “홍범도 장군 논란을 정리해달라” “이태원 참사 유족들을 만나고 책임자들에게 책임을 지워달라”는 등의 요청을 듣고 “제가 다 기억했다가 최대한 국정에 반영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여권 한 인사는 “내년 총선에서 패배하면 야당이 아니라 여당 내부로부터 버림받을 것을 윤 대통령도 잘 알기에, 이제는 바뀔 것”이라고 했다. 정말로 그렇게 된다면 야당도 바짝 긴장하면서 정치권이 ‘잘하기 경쟁’ 궤도에 오를 수 있다. 그러면 총선에서 ‘저 사람 싫어서’가 아니라 ‘이 사람 좋아서’ 투표장으로 향하는 유권자도 많아질 것이다. 윤 대통령이 이런 선순환의 물꼬를 틀 수 있을까.

jayb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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