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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찬란한 4월에 날아들 청구서

등록 2023-11-22 18:45수정 2023-11-23 02:43

지난 1월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 전체회의. 연합뉴스
지난 1월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 전체회의. 연합뉴스

[뉴스룸에서] 전종휘 | 사회정책부장

약 100년 전 시인 티 에스 엘리엇이 시 ‘황무지’ 첫 대목에서 노래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는 시구는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널리 회자된다. 모든 것이 얼어붙은 동토의 시기를 지나 만물이 활짝 소생하는 봄을 두고 시인은 아름답다는 대신 왜 잔인하다고 했을까? 그는 죽은 땅 위에 라일락을 키우고, 기억과 욕망을 뒤섞고, 활기 잃은 식물의 뿌리를 봄비로 휘저어야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를 두고 시가 나오기 4년 전인 1918년 11월 제국주의 국가들이 맞붙어 많은 이들이 죽고 문명이 폐허가 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황폐화한 세상에서 새로운 꿈과 희망을 일으키려는 인류의 처절함을 상징한다는 해석이 설득력을 얻는다.

시대의 가치가 끊임없이 후퇴하는 지금의 이 혹독한 정치적 추위 속에서 죽은 땅을 건너는 현재의 우리에게 총선이란 이름으로 다가올 2024년 4월이 황무지일지 옥토일지를 단언하는 건 섣부를 수도 있다. 다만 황무지가 눈에 아른거린다는 얘기 정도는 할 수 있겠다. 일찍이 한반도에서 경험해본 적 없는 수준의 초고령화 저출생 상황과 임금을 비롯한 사회 양극화 속에서 정부가 돌파해야 하는 온갖 개혁이 드리우는 암울한 전망에 관한 얘기다.

지금의 문제는 행정부의 직무 유기에서 비롯한다. 우선 가입자 2200만여명을 비롯해 국민의 노후 생활을 책임져야 할 국민연금이다. 국민연금법은 보건복지부 장관에게 5년마다 국민연금 재정 수지를 계산하고, 연금보험료를 포함한 국민연금 운영 전반에 관한 계획을 세운 뒤 대통령 승인을 받아 그해 10월 말까지 국회에 제출하라고 규정한다. 보험료를 얼마나 더 내고 나중에 연금은 얼마나 받을지, 국민연금기금은 수익률 개선을 위해 어떻게 운용할지 등을 결정해 보고하란 얘기인데, 이를 어려운 행정 용어로 ‘모수 개혁’이라고 한다.

하지만 조규홍 복지부 장관은 이번에 그렇게 하지 않았다. 구체적인 수치는 모두 빠진 알맹이 없는 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공을 여의도로 떠넘긴 셈이다. 국회 연금개혁특별위원회는 곧 공론화위원회를 구성해 논의 절차에 들어간다. 현재까지 정부 산하 민간위원회 등에서 논의된 내용을 보면, 소득의 9%인 보험료율을 12% 이상으로 올리고 연금을 받기 시작하는 나이는 더 늦추는 방향으로 조정이 불가피해 보인다. 가입자가 보험료를 내던 시기 평균 소득 대비 연금액을 뜻하는 소득대체율은 40%를 향해 조금씩 낮아지고 있는데, 이를 더 올릴지는 미지수다.

정부와 여당으로선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이런 인기 없는 안을 논의하자니 유권자들이 등 돌리는 모습이 눈에 선했을 것이다. 하지만 국민의힘 소속인 주호영 특위 위원장마저 “공론화위원회를 하려면 어느 정도 틀이 잡힌 안건을 주고 (참여자에게) 의견을 물어야 한다”며 모수 개혁 방안을 만들어달라고 할 만큼 정부안은 허술하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500명의 공론화위원을 선정하고 이들이 모수 개혁 밑그림도 없는 맹탕 정부안과 민간자문위안을 토대로 총선 때까지 공론조사를 마무리할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행정부는 총선 때까진 결정하지 않을 테니 당사자들이 논의해 결정하라’는 태도는 이 정부가 처음으로 손댄 노동개혁 과제인, 근로시간 개편방안에선 더욱 혼란스러운 방식으로 나타났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모든 일터에서 주 6일 기준 최대 69시간 집중노동이 가능한 연장근로시간 관리 단위 개편방안을 밀어붙이던 정부는 지난 13일 수정안을 내며 한발 물러섰다. 그나마 다행이지만 그 근거가 국민 설문조사였다. 정부가 핵심적인 사회정책 개편의 근거로 설문조사를 들이민 건 무책임한 일이다.

일방적인 밀어붙이기를 하던 정부는 앞으론 개혁 논의가 경제사회노동위원회를 거치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지금까지 반노동적인 정부 태도를 봤을 땐, 사회적 대화를 통한 개혁방안 마련보다는 총선을 의식한 눈치보기에 가까워 보인다. 근로시간 개편은 사용자 쪽이든 노동자 쪽이든 한쪽 표를 깎아 먹기 좋은 아킬레스건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당이 총선에서 다수당이 되면 얘기는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만물이 소생하는 내년 4월 총선 이후 정부가 보낼 청구서가 두렵다.

symbi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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