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 이재명 | 기획부국장
한때는 가슴 설레게 했지만 지금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리는 단어들이 있다. 민주주의, 정의, 자유, 평등 같은. 젊어서는 선명했던 의미가 세월과 함께 탁해진 눈빛처럼 변질되고 흐릿해 보인다. 우리가 배우는 사상은 단순한데 세상은 복잡해서일까. 거악이 희미해지면서 사회 변혁이 일상의 요소로 쪼그라들어서일까. 시간은 우리 편이라는 믿음은 오만한 가정이었던 걸까.
1987년 민주화 이후 36년이 흘렀다. 해방 뒤 권위주의 암흑기보다 더 긴 민주화의 시간을 통과한 것이다. 그런데도 민주주의는 여전히 위태롭다. 정치는 분열과 대립으로 밤을 지새우고, 두 입장 사이의 입장을 지지하진 못할망정 다양성을 소멸시킨다. 공론장엔 혐오와 배제의 언어가 넘쳐난다. 정치의 사법화와 사법의 정치화가 돌고 돈다. 시민들은 편을 가르고 자기편에 서야만 안전하다는 확증 편향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그 골은 너무 깊어 총칼 없는 내전을 치르는 형국이다.
민주주의는 완벽과 거리가 멀지만 우리 내면의 어두운 본성을 잠재우고 선한 본성을 발휘할 수 있음을 보여준 유일한 정부 형태다. 누군가의 위에 군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보살피려 유권자, 노동자, 소비자, 소수자이기도 했던 시민들은 민주주의에 매달렸다. 때론 자신의 권리 실현을 정의와 동일시하거나, 자신이 가장 불쌍하다는 과장된 피해의식에 다른 이의 권리에 천착하지 못했다. 가끔은 사적 이익이 공적 이익으로 포장됐다. 권리와 권리의 무한 충돌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결국 공동체적 구조물을 허약하게 했다.
개인의 자유와 집단적 책임이 조화를 이룰 수는 없을까. 예컨대 층간소음에서 충돌하는 두 권리인 사생활을 누릴 자유와 침해받지 않을 자유의 공존 말이다. 민폐를 끔찍이 싫어하는 한 지인은 아래층에 사는 수험생 가족의 눈치를 보느라 주말이면 펜션을 전전한다. 요즘 즐겨 보는 노래 오디션 프로그램을 마음껏 소리 높여 듣고 싶어서다. 이 경우엔 한쪽이 자신의 권리를 양보하면서 공존―해결이 아니다―이 가능했지만, 층간소음 탓에 벌어지는 끔찍한 사건들에서 보듯 모두가 그런 것도, 그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래층 사람과 위층 사람들을 따로 모아 어느 쪽이 다수인지를 확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소음의 근원지가 꼭 윗집은 아닐뿐더러 대부분 위층이면서 아래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딜레마는 잇따른 비극을 불러온 학부모·학생과 교사, 학생과 학생 사이 갈등에서도 피할 수 없다.
자신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자신의 약점을 보지 못하는 자기기만의 함정처럼 민주주의에 대한 과도한 기대가 민주주의를 좀먹는 건 아닐까. 어쩌면 민주주의는 홀로 설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국가가 헌법 맨 앞자리에 자신의 정체성을 ‘민주공화국’으로 규정한 이유가 거기에 있지 않을까. ‘민주’와 ‘공화’는 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두 바퀴이자 동전의 양면으로 봐야 한다. 이 조항은 헌법 제정 이래 단 한번도 바뀌지 않았음에도 민주주의와 달리 공화주의는 외면하거나 홀대했다. 공화는 그렇게 재조명되기를 기다리며 묻혀 있었다.
민주주의가 ‘다수의 의사’를 중시한다면 공화주의는 ‘공존’, 다수자와 소수자의 통합, 다양성에 방점을 찍는다. 개인의 자율을 존중하면서도 모든 시민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의무를 공유하고, 공동체 발전에 기여하는 삶을 지향한다. 공화는 “누가 국가권력을 획득하더라도 견제와 균형을 통한 공존, 연대, 통합을 추구하고 그 이상은 시민 모두가 ‘같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것”(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이다.
공화주의 가치에 주목하는 이유는 정치의 정상화를 꾀하고 분열과 대립으로 양극화된 사회를 극복하는 길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공화 단계는 적과 동지의 이분법보다는 경쟁자이면서도 동시에 협력자라는 이중적 정체성으로 서로를 상대하는 언행이 필요하다. 공화주의는 심화되고 있는 계층·지역·세대적 분열에 대한 해법을 개발할 수 있는 잠재력과 가능성이 있다.”(채진원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 교수)
우리는 삶 속에서 논리적 사고로는 화해될 수 없는 대립들을 화해시켜야 하는 상황에 종종 놓이게 된다. 여기엔 그 대립들을 초월한 어떤 힘을 끌어들여야 한다. 공화주의의 재발견이 그 실마리가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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