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6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죄르지 루카치(1885~1971)의 ‘소설의 이론’ 도입부는 독일 낭만주의자들이 ‘온전한 세계’로 이상화한 호메로스 시대의 그리스, 이른바 ‘서사시적 상황’에 바쳐진 헌사다. 제1차 세계대전의 암울한 기운 속에 써 내려간 이 책에서 루카치는 소설을 ‘신이 떠나버린 세계의 서사시’라고 했다. 세계에 조화와 통일성을 부여했던 신적 질서(총체성)가 파괴된 뒤 더는 현실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된 총체성을 새로운 형식을 통해 서사적으로 구현하려는 근대적 시도가 소설이란 얘기였다. 소설이 그리스 서사시를 좇아 추구했던 총체성은 자아와 세계, 개인과 공동체가 조화와 일치 속에 존재하는 미적 균형 상태다. 이런 총체성은 정치가 현실에 구현하려 오랫동안 분투해온 근원적 이상과도 겹친다. 현대 민주정치에서 그것은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개인과 집단의 요구가 공동체의 의사결정에 균등하고 조화롭게 반영되는 이상적 정치 상황일 것이다. 한국 정치에 서사시적 상황이 있었다면, 1988년 4월 총선 뒤 19개월 남짓 작동하다 1990년 초 3당 합당과 함께 소멸한 13대 국회 전반기의 ‘다당제 여소야대’ 국면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시기는 19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며 권위주의 정권 시절 억눌렸던 사회적 요구가 도처에서 분출하던 특수 상황이었다. 이념 지형과 느슨하게 결합한 지역 정당 체제가 대선에 이어 치러진 총선에서 드라마틱한 다자 정치구도를 낳았다. 전체 299개 의석 가운데 집권 민주정의당의 의석은 125석에 그쳤고, 평화민주당이 70석, 통일민주당 59석, 신민주공화당이 35석을 나눠 가진 것이다. 어떤 정당도 자신의 의지를 독자적으로 관철할 능력이 부재했던 현실은 경쟁 정당 간의 절충과 타협이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역설적 상황을 가져왔다. 이는 실질적인 다자 정치구도 안에서 당대가 요구한 과거 청산과 사회개혁 입법들이 격렬한 진통 없이 결실을 보게 했다. 국회 원구성과 관련한 여야 배분 원칙이 만들어졌고, 5공 비리와 5·18 광주, 언론 통폐합 진상규명을 위한 청문회가 잇따라 열렸다. 지방자치제 부활에 집권당과 야 3당이 뜻을 모았고, 다수의 사회개혁 안건들이 큰 갈등 없이 처리됐다. 그러나 그 시간은 이제, 산문적인 세속의 권력 질서가 잠시 느슨해진 틈을 타 홀연히 강림했다 사라진, 시적이고 찰나적인 메시아의 순간처럼 여겨질 뿐이다. 실제로 1990년 이후 ‘소선거구 단순다수대표제'가 강제한 양당 구도의 경로 의존성이 심화하면서, 1988~89년의 서사시적 상황은 2017년 탄핵을 전후로 펼쳐진 역동적 다자 정치 국면을 제외하면 더는 등장하지 않았다. 총선이 4개월 앞으로 다가온 지금, 한국 정치를 지배하는 것은 상대의 존재 자체를 불온시하며 최고 권력 획득을 향해 내달리는 극단적 열정들이다. 더불어민주당과 이재명 대표는 2022년 대선 당시 ‘다당제 합의 정치 실현’을 명분으로 내건 연동형 비례대표제 확대와 위성정당 금지 약속을 ‘적에게 유리하다’는 이유로 내팽개치려 한다. 그사이 “승자독식 선거제도를 근본적으로 개혁해 실질적인 다당제를 구현”(이재명 대표)하리라던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국가와 국민에게 적절한 제도인지 판단하고 검토해야 하는”(김영진 당대표 정무조정실장) 위험하고 불합리한 선거제가 됐다. “비례민주당이 성공해 민주당이 1당 지위를 지킨다면 어떻게 될까? 대통령의 레임덕은 늦춰질 것이다. 그러나 소수정당의 지분이 줄어들고 양당 구도가 공고화되면서 민주당과 미래통합당의 대결 정치는 한층 가팔라질 것이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정치에 대한 냉소와 혐오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리란 점이다. 가치와 윤리와 명분이 설 자리가 좁아지면서 ‘반인반수의 정치’는 완전한 ‘짐승의 정치’를 향해 거침없이 진격할 것이다.” 2020년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의 비례위성정당 창당이 가시화할 때 쓴 ‘비례민주당이 성공한다면’이란 칼럼의 일부다. 극단화된 대결 정치는 이후 현실이 됐다. 서사시적 상황으로 돌아가진 못해도, 승리의 결과가 ‘짐승의 시간’이라면 너무나 비참하지 않은가. 민주당과 이재명 대표가 결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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