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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김봉규의 사람아 사람아] 쭈그러진 고무신 하나하나에 깃든 것은…

등록 2023-12-12 18:42수정 2023-12-13 09:39

제노사이드의 기억 세종

발굴단장에게 부탁해 형체가 온전한 고무신을 임시안치소 밖으로 조심스럽게 옮겨 펼쳐 놓았다. 5단짜리 사다리 위에 올라 사진을 찍기 위해 아래를 내려 보는데, 나란히 놓인 고무신들이 국가폭력에 무참하게 쓰러진 희생자들이 한명씩 누워 있는 것처럼 보이는 환영에 사로잡혔다. 눈두덩이가 뜨거워지면서 흘러내리는 눈물 때문에 뷰파인더 속 고무신이 흐릿하게 아른거렸다.

지난 2018년 9월 폭 25m짜리 도로가 나고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는 세종시 연기면 산울리(257-2번지, 옛 연기군 남면 고정리) 일원 야산에서 민간유해발굴단(인류진화연구소)이 한국전쟁 당시 군·경에 의해 학살된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했다. 발굴 현장에선 유해 7구와 함께 검정 고무신 75점, 흰색 고무신 6점, 당시 경찰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카빈소총 탄두 및 탄피가 발굴됐다. 고무신 안쪽 바닥에는 ‘송’ ‘이’ ‘천’ 등 신발 주인의 성씨가 굵게 새겨져 있었다. 김봉규 선임기자
지난 2018년 9월 폭 25m짜리 도로가 나고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는 세종시 연기면 산울리(257-2번지, 옛 연기군 남면 고정리) 일원 야산에서 민간유해발굴단(인류진화연구소)이 한국전쟁 당시 군·경에 의해 학살된 희생자들의 유해를 발굴했다. 발굴 현장에선 유해 7구와 함께 검정 고무신 75점, 흰색 고무신 6점, 당시 경찰이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카빈소총 탄두 및 탄피가 발굴됐다. 고무신 안쪽 바닥에는 ‘송’ ‘이’ ‘천’ 등 신발 주인의 성씨가 굵게 새겨져 있었다. 김봉규 선임기자

한국전쟁 당시 얼마나 많은 민간인이 학살되었을까? 1971년 국방부가 발간한 ‘한국전쟁사4’(760쪽)는 대한민국 비상경비총사령부 정보처의 발표를 인용 1950년 6월25일~10월31일 넉달 남짓 동안 남쪽 민간인 106만968명이 희생됐다고 밝혔으나, 1997년에 발간한 ‘한국전쟁사1’ 개정판(36쪽) 학살 피해자 수가 12만936명이라고 설명한다. 1960년 4·19혁명 뒤 결성된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희생자 전국유족회(한국전쟁유족회)는 자체 조사를 통해 학살 피해자 수가 약 114만명이라고 주장했지만, 5·16군사쿠데타 뒤 군이 관련 자료를 모두 수거해 가 그 근거를 확인하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한국전쟁유족회는 2017년 발행한 ‘한국전쟁 전후 백만 민간인학살의 진실’에서 “1948년 제주4·3항쟁, 여순사건 등 전쟁 전 이미 민간인학살은 시작되었다. 그 희생자 수를 더해 보면 학계에서 동의하는 100만명이라는 주장이 지나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렇듯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학살 희생자 수는 시기별로, 발표 주체별로(국가기관이냐 민간(유족회)이냐) 크게 차이가 난다.

그렇다면 학살돼 매장된 민간인 희생자 가운데 몇분의 유해가 발굴되었을까? 1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는 2006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학살과 관련한 유해매장 추정지는 169개소이며, 일부 지역에 편중된 것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널리 분포 산재해 있다”고 밝혔다. 그 가운데 지난 2020년까지 13곳에서 유해발굴이 진행돼 유해 1617구를 수습했다. 2022년 7곳, 2023년 8곳에서 유해발굴이 진행됐지만 전체 규모를 고려하면 그 속도는 더디기만 하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제주와 남해안 일대에서 수장된 희생자들의 유해는 영영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한번은 개발을 앞두고 있던 유해발굴 현장을 찾았다. 세종시 연기면 산울리(257-2번지) 일원 야산이었는데, 폭 25m의 도로와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자리였다. 이곳에서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7일 예비검속으로 조치원경찰서에 갇혀 있던 남성 보도연맹원 100여명이 끌려와 군·경에 총살됐다. 학살 당시 목격자 및 주검을 수습한 참고인 등의 진화위 구술조사에 따르면, 희생자들은 산 능선을 따라 일렬로 꿇어앉혀진 채 총살했다고 한다. 유해발굴단(인류진화연구소)이 지난 2018년 9월28일부터 한달가량 유해를 발굴했다.

유해발굴 현장 임시안치소는 유해 7구와 유품들을 보관하고 있었는데, 유독 눈에 들어온 것은 노란 플라스틱 상자에 담겨 있는 여러켤레의 검정 고무신들이었다. 81점 가운데 검정색 고무신이 대부분을 차지했고, 흰색 고무신이 6점 있었다. 고무신 안쪽 바닥에는 ‘송’ ‘이’ ‘천’ 등 신발 주인의 성씨가 크고 굵게 새겨져 있었다. 발굴단장에게 부탁해 형체가 온전한 고무신을 임시안치소 밖으로 조심스럽게 옮겨 펼쳐 놓았다. 5단짜리 사다리 위에 올라 사진을 찍기 위해 아래를 내려 보는데, 나란히 놓인 고무신들이 국가폭력에 무참하게 쓰러진 희생자들이 한명씩 누워 있는 것처럼 보이는 환영에 사로잡혔다. 눈두덩이가 뜨거워지면서 흘러내리는 눈물 때문에 뷰파인더 속 고무신이 흐릿하게 아른거렸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을 연구해 온 노용석 교수는 ‘국가폭력과 유해발굴의 사회문화사’(2018)에서 이렇게 썼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은 국가 공권력의 명백한 잘못이었음이 국가기관인 진화위의 조사를 통해 입증되었다. 민간인학살은 전쟁 중에 우연히 발생한 게 아니라 조직적으로 계획되었다는 점이 분명하다. 집단학살이 전쟁 발발 석달 새 국민보도연맹원을 중점 대상으로 신속하게 이뤄졌다는 점이 근거다. 민간인 희생자 유해발굴의 의미는 한국 현대사에서 잊혔던 ‘비정상적 죽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표상이다. 하지만 현실은 과거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되었던 피해자들의 유해가 아직 방치되어 있다. 이러한 ‘억압된 기억’과 ‘원한’을 사회에 그대로 남겨둔 채 우리는 공동체를 발전시킬 수 있을까?”

그런 민간인학살의 주된 계기이자 이유였던 한국전쟁 종전이 어느새 70년을 맞았고, 한국은 산업화 민주화 시대를 거쳐 경제적으로 선진국 반열에 들었다. 하지만, 과거를 대하고 기리는 방식은 그에 부합하는 수준인가. 대부분 팔순을 훌쩍 넘긴 유족들에 한국사회는 얼마나 관심을 보여왔는가. 그 유족들의 한숨 속에서 어느덧 올 한해도 저물어 간다.

김봉규

사진부 선임기자. 다큐멘터리 사진집 ‘분단 한국’(2011), ‘팽목항에서’(2017)를 출간했다. 제주 4·3 학살 터와 대전 골령골을 비롯해 전국에 흩어진 민간인학살 현장을 서성거렸다. 안식월 등 휴가가 발생하면 작업지역을 넓혀 캄보디아 ‘킬링필드’를 비롯한 아시아, 폴란드 전역과 독일, 네덜란드, 체코, 오스트리아 등 나치 시절 강제 및 절멸수용소 등을 15년 넘게 헤매고 다녔다.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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