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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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수
독자들의 의견은 대략 비슷합니다. 아무리 노무현 정부가 힘이 없어도 그렇지, 대통령 부인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거 아니냐는 겁니다. 심지어 8명의 독자는 표기 문제 때문에 <한겨레>를 끊겠다고까지 통보해 왔습니다. <한겨레>가 ‘노 대통령 부인 권양숙씨’라고 표기하는 건 신문사 자체의 표기원칙에 따른 것일 뿐입니다. 다른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한겨레>는 1988년 창간 이래 역대 대통령 부인들을 모두 ‘○○○ 대통령 부인 ○○○씨’라고 표기해 왔습니다. 노태우 대통령 부인 김옥숙씨, 김영삼 대통령 부인 손명순씨, 김대중 대통령 부인 이희호씨…, 모두 이렇게 적어 왔습니다. 처음엔 저희도 낯설었습니다. 대통령 부인에겐 ‘영부인’ 또는 ‘여사’란 호칭을 쓰지 않으면 큰일 나는 줄 아는 권위주의 정권 때는 더욱 그랬습니다. 한겨레가 나름의 표기 원칙을 세운 데엔, 용어에서 나오는 권위주의적 색채를 지우려는 뜻이 있었습니다. 남의 아내를 높여 부르는 보통명사인 ‘영부인’(令夫人)은 3공화국 시절 대통령 부인만을 부르는 말로 승격됐습니다. ‘각하’는 대통령을, ‘영부인’은 대통령 부인을 뜻하게 됐고, 대통령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 이 호칭을 쓰면 괘씸죄에 걸렸습니다. 권위주의 시대에 호칭이 어떻게 왜곡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한겨레>가 호칭 표기에서 ‘여사’란 표현을 쓰지 않기로 한 데엔, 남성과 여성을 구분하는 호칭을 가급적 배제하자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창간 무렵엔 모든 언론이 여성을 ‘○○○양’이라고 표기하거나 또는 괄호 안에 ‘여’라는 단어를 넣어 남녀를 구분했습니다. <한겨레>는 창간 초기부터 여성이나 남성 모두를 ‘○○○씨’로 표기했습니다. 호칭에서부터 남녀를 구별하는 시각을 피하자는 뜻이었습니다. 여성의 사회활동이 드문 시절에 ‘저명한 여류인사’를 지칭하는 단어였던 ‘여사’라는 표현을 <한겨레>가 사용하지 않기로 한 데에도 비슷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이런 원칙에 따라 <한겨레>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부인을 ‘홍라희씨’로 표기했고, 고 문익환 목사의 부인도 ‘박용길씨’ 또는 ‘박용길 장로’로 써 왔습니다. 몇몇 독자는 “<한겨레>의 다른 기사에선 ‘여사’란 호칭을 쓴 걸 봤다”고 지적했습니다. 실제 인터넷을 통해 기사를 검색해 보면 흔치 않지만 ‘아웅산 수치 여사’ 등의 표현을 쓴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용어를 제대로 거르지 못한 기자 및 편집국 간부들의 실수에 따른 것입니다. 앞으로는 이런 실수가 나오지 않도록 더욱 조심하겠습니다. 막상 청와대는 이 문제에 대해 어떤 항의도 표시해 온 적이 없습니다. 천호선 청와대 대변인은 “참여정부 들어서 권위주의적 표현인 ‘영부인’ 대신에 내부에선 ‘여사’란 표현을 쓰고 있고, 대개의 언론도 그런 표현을 쓰고 있다. 그러나 한겨레가 일관된 원칙을 갖고 달리 표현하는 데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없다”고 밝혔습니다. 독자 여러분도 <한겨레>의 표기 원칙을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박찬수/정치부문 편집장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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