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곤/사회부문 부편집장
편집국에서
‘예슬이와 혜진이’ 사건으로 문을 연 2008년 봄의 들머리는 잔인했습니다. 6일에도 경기 일산에서 여고생 성추행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계절은 어느덧 꽃피는 봄이건만, 부모들의 마음은 여전히 얼어붙어 있습니다. 어린아이들을 상대로 곳곳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범죄는 이 시대 모든 부모들의 공통된 공포의 대상으로 자리잡았습니다.
범죄의 일차적 책임이야 범인들이 져야 하겠지만, 그들 탓만 하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국민들 사이에선 경찰의 무능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경찰은 이번 사건에서도 ‘초동수사 부실’에다 ‘범인 입만 따라가는 수사’ 행태를 보였습니다.
저희는 경찰이 요즘 들어 시국치안에 부쩍 신경을 쓰는 것이 민생치안 소홀과 관련 있지 않나 하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과거의 예를 비춰 봐도, 경찰이 법질서 확립을 외치면서 시위진압이나 시민단체 등의 동향 파악 따위에 골몰할 때 정작 민생과 관련된 ‘큰 사건’에서는 허둥대는 모습을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일산 초등생 납치미수 사건의 범인이 달아난 시각에 경찰 총수는 ‘경제 살리기 세미나’에 참석 중이었습니다. 경찰의 조직 특성상 ‘윗분의 관심사항’은 일선 경찰에는 가장 중요한 업무지침이 되기 마련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일선 경찰관들을 상대로 취재를 해보니 “경찰 조직 전체가 시국치안 쪽으로 무게중심이 옮겨가면서 자연히 민생치안을 소홀히 하는 경항이 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습니다. 1일치 1면에 내보낸 ‘아이들 생명 위협받는데, 시국치안 골몰’이란 기사는 이런 취재 결과를 담은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예슬이·혜진이’의 불행을 사전에 예방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부가 쏟아놓는 대책들을 보면, 제대로 된 예방책 마련보다는 국민의 분노에 편승한 인기대책에 머물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법무부가 내놓은 ‘혜진·예슬이법’만 보더라도, 뼈대는 아동 성폭행 살해범을 사형이나 무기징역에 처하자는 게 핵심입니다. 물론 성범죄는 엄벌해야 합니다. 하지만 형량을 올리는 식의 대책이 범죄 예방에 큰 실효성이 없다는 것은 더욱 잔혹해져 가는 범죄의 역사가 말해 줍니다.
일부 언론에서는 ‘피의자의 얼굴을 공개해야 한다’는 주장도 합니다. 하지만 <한겨레>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런 주장이 자칫 우리 사회가 힘겹게 쌓아온 인권의 눈높이를 내려놓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법 앞의 평등, 소급처벌 금지, 확정판결이 나기 전까지 무죄추정의 원칙 등은 누구에게나 적용해야 하는 것이며, 이를 두고 비현실적인 온정주의라고 비난하는 건 적절치 않다”(조효제 성공회대 교수)는 지적은 경청할 만합니다.
범죄를 완벽하게 막을 수 있는 대책이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겠지요. 하지만 최소한 실효성 있는 대책의 첫머리에는 범죄 예방 인력과 예산의 확대가 와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 경찰의 예산과 인력 운용에서 민생치안이 뒷전에 밀려나 있지는 않은지 뒤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근본적으로는 범죄의 사회경제적 배경을 살펴 사회의 건강성을 찾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세계보건기구가 경찰·의료·교육의 기능이 연계된 종합적인 범죄 예방책을 권고하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새겨들어야 할 대목입니다.
아직 장례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한 예슬이의 한 맺힌 원혼은 어디를 떠돌고 있을까요? 한시바삐 예슬이의 주검이라도 온전하게 찾아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예슬이와 혜진이의 명복을 거듭 빕니다.
이창곤/사회부문 부편집장goni@hani.co.kr
이창곤/사회부문 부편집장go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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