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철 국제부문 편집장
요즘 ‘친노’ 인사들이 잘나간다고 한다. 내년 6월 지방선거 때 문재인 부산시장 후보, 유시민 대구시장 후보, 한명숙 서울시장 후보 카드 이야기도 나온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최근 여론조사에서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에 이어 대선주자 2위 반열에 올랐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친노 인사들을 두고 ‘폐족’ 운운했던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 민심의 풍향계가 바뀌긴 바뀐 모양이다. 최근 우연히 만난 수도권의 야당 원외위원장은 ‘서거 정국’ 이후 만나자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고 했다. 그동안 코빼기도 안 보이던 이들이 하나둘씩 연락을 해온단다. 지방선거에서 한자리 해보려는 지역 정치인들이 공천을 염두에 두고 접근하는 것이다. 하반기 재보궐선거와 내년 지방선거를 둘러싼 선거구도가 크게 변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복잡한 현실 정치의 흐름 속에서 친노 인사들이 일희일비하지 않았으면 한다. 노무현의 뜻을 담고 살아가는 이들답게 정치적 진퇴에서도 신중하길 바란다. 지금의 ‘추모 정국’이 언제까지 계속되지는 않을 것이다. 정치는 어찌 됐든 살아 있는 사람의 이야기이고, 그 사람 속에 투영되어 있는 미래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렇다고 노 전 대통령의 정치적 생명력이 쉽게 사그라들 것 같지는 않다. 얼마 전 나간 친구 모임에서는 아직도 노무현 얘기를 하고 있었다. 한 친구 부인은 노 전 대통령이 세상을 뜬 즈음 어느 날의 꿈 이야기를 했다. 꿈에 머리가 희끗희끗한 사람이 트럭에 앉아 이삿짐 비용을 달라고 했다고 한다. 친구 부인은 “노 전 대통령이 저승 가는 노잣돈을 달라고 한 것”이라며 “꿈에서 돈 아끼겠다고 1만원만 드린 게 후회스럽다”고 했다. 억지 춘향식 해석인지 모르겠으나, 노 전 대통령이 아직도 국민들 가슴속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현실 정치에서 ‘친노’의 자리는 노무현 정부와의 연속성과 단절, 그 사이의 어딘가가 아닐까 싶다. 미국 정치에서 이 단절과 연속성을 잘 볼 수 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주변에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 시절 인사들이 다수 포진해 있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을 필두로 오바마 대통령을 거의 포위하다시피 하고 있다. 그들이 오바마의 대외정책과 경제정책의 구체성을 담보한다. 그렇다고 오바마의 48년 삶 속에서 영근 비전마저 그들이 만들지는 못한다. 오바마의 검은 피부색은 과거의 미국, 과거 민주당 정권과의 단절의 표지이다. 한국에서 만일 정권교체가 다시 이뤄진다면 친노 인사들이 그 연속성의 한 축을 담보할 수는 없을까?
노무현 정부의 청와대 비서실장을 지낸 문재인 변호사는 부산시장보다는 노무현의 ‘영원한 친구’가 더 어울리는 것 같다. 노무현 정부 시절 그가 굳이 국회의원 배지를 달려고 했으면 달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가 부산시장이나 부산 지역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것은 마음만 바꿔 먹으면 가능한 일이었다. ‘서거’ 이후 대선주자 반열에 오른 유시민 전 장관에게는 앞으로 많은 결단의 시간이 남아 있는 것 같다. 그 결단의 시기에 생전의 노무현이 보여주었던 소탈함과 따뜻함의 면모도 더 많이 보여주길 기대한다.
현실 정치인이 대부분인 친노 인사들에겐 가혹한 요구일지 모르지만, 친노가 한국 정치의 ‘밀알’이 되었으면 좋겠다. 노무현이 그랬듯이, 노무현의 이름으로, 한국 정치의 새싹을 틔우는 작은 밀알로 되살아나길 기대해 본다.
백기철 국제부문 편집장kcbae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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