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택 수석부국장
편집국에서
엄기영 <문화방송> 사장은 지난 3일 임직원들에게 보낸 글에서 “한바탕 거대한 태풍이 밀려오는 듯”하다고 썼다. 방송문화진흥회에 ‘뉴라이트 이사’들이 대거 진입하고 <와이티엔> 구본홍 사장은 사실상 경질됐다. 다음주부턴 <한국방송> 이사진 개편이 시작된다. 예상대로 방송가에 태풍이 몰아치고 있다.
정부·여당의 방송장악 시나리오는 지난해 5월부터 착착 실행에 옮겨지고 있다. 되돌아보면 이 시나리오는 ‘권·언 합동 프로젝트’로 진행됐다. 교육과학기술부는 현직 교수인 한국방송 이사를 해임하는 데 동원됐고, 감사원과 검찰은 한국방송 사장을 내쫓는 데 총대를 멨다. 와이티엔 사장에 대통령 특보 출신을 낙하산으로 투하하는 등 모든 시나리오를 진두지휘한 건 ‘형님 친구’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이다.
지난해 방송사 인사가 시나리오 1단계라면, 2단계는 언론법 밀어붙이기다. 이 단계에선 ‘권력’보다 친정부 ‘언론’들이 앞장섰다. 조중동이 일제히 법 개정에 반대하는 야당과 시민·언론단체를 두들기면서 바람을 잡았다. 그중에서도 <중앙일보>의 활약이 단연 돋보였다.
한나라 “법안통과 공언해…김형오 의장이 배신했다”(1월2일치 4면), 한나라 의총 “피 한방울 안 묻히려는 김형오 의장…우리가 잘못 뽑은 듯”(1월3일치 5면), 민생법안 하루가 급한데…김 의장 “직권상정 앞으로도 자제”(1월5일치 6면), ‘김형오+민주당’ 장벽…한 걸음도 못 나간 여권, 책임론 번지나(1월6일치 5면). 날치기에 총대를 메지 않는다는 이유로, 국회의장을 연일 머리기사로 조져대는 것은 정상적인 언론의 모습이 아니다.
반면 청와대와 여당에는 노골적인 구애를 펼쳤다. ‘한나라 요즘 화두는 서민’(6월30일치 12면), ‘중도·친서민·통합’ MB귀국 가방엔 이 세가지 있었다(7월16일치 12면) 정도는 약과다. ‘서민 150만명 8·15 특별사면’(7월28일치 1면 머리) 기사는 왜곡보도 수준이다. 대기업 간부건 비정규직 노동자건 묻지도 않고 음주운전 초범은 모두 사면한다는데 ‘서민’을 갖다 붙인 건 너무했다.
언론법 날치기 드라마의 총감독은 청와대고 행동대로 나선 건 한나라당이지만, 제작자는 조중동이고 그중에서도 최대 투자자이자 이해관계자는 중앙일보다. 그 서슬에 김형오와 박근혜도 무릎 꿇었고, 남·원·정이니 민본21이니 하던 소장파들까지 찍소리도 못하고 납작 엎드렸다.
이제 방송사를 실제로 접수하는 3단계가 남았다. 야당과 시민·언론단체가 대국민 장외홍보에 나서자, 이번에도 조선에 한발 앞서 중앙이 나섰다. ‘신방겸영으로 여론독과점이 심화된다지만 지상파 방송 지분이 10%에 불과해 겸영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조중동이 ‘땡박뉴스’를 할 거라고 주장하지만 누가 그런 뉴스를 보겠느냐. 시청률이 중요한데 말이 안 되는 소리’(8월4일치 3면)라는 논리를 폈다.
그러나 한국방송은 코드사장이 임명된 뒤 “(방송법 개정안이) 신문의 지상파 방송 지분을 10%로 낮춰 글로벌미디어 육성 기반을 마련하자는 취지가 무색해졌다”는 자해성 보도까지 할 정도로 이빨이 무뎌진 지 오래다. 문화방송까지 ‘뉴라이트’에 장악되기 직전이어서 조중동 방송까지 나오면 여론 독과점은 시간문제다. 또 조중동이 지상파가 아니라도, 지상파 채널 사이의 황금 종편 채널을 나란히 장악해 5번에서 12번까지 몽땅 ‘엠비 방송’ 뉴스만 틀어대면 시청자가 다른 뉴스를 볼래야 볼 재간이 없다.
하지만 모든 게 시나리오대로만 된다면 세상사가 재미없다. 재투표·대리투표가 무효라는 법학자들이 다수다. 국민의 61.5%는 날치기가 무효라고 생각하고, 55%는 조중동과 정부·여당의 오만한 시나리오를 이미 간파했다. 국민을 우습게 아는 권력은 반드시 망한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김이택 수석부국장 ri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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