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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칼럼

[편집국에서] 제국의 기억, 제국의 기억상실 / 김영희

등록 2011-05-04 19:55수정 2011-05-04 21:25

김영희 국제부장
김영희 국제부장
오사마 빈라덴의 죽음을 알리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연설은 감동적이었다. 예고시간을 1시간도 훌쩍 넘겨 기자회견장에 선 오바마는 담담하지만 시적으로 ‘그날’을 묘사했다. “약 10년 전 미국인들한테 가해진 역사상 최악의 공격으로 밝은 9월의 그날이 어둠에 물들었다. 공중납치된 여객기가 구름 한 점 없는 9월의 하늘에 날아드는 9·11의 이미지는 우리 국가의 기억에 뜨거운 화상으로 남았다.”

미국의 10년 트라우마가 사라지는가? 한밤중 백악관 앞에 몰려들어 환호성을 지르는 미국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어지는 연설을 들은 사람이라면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가 보지 못하는 최악의 이미지들을 알고 있다. 저녁 식탁의 빈자리. 아이들은 어머니와 아버지 없이 자라나야 했다. 아이들을 껴안는 그 기분을 영원히 알 수 없는 부모들. 3000명에 가까운 시민들이 우리 마음에 깊은 구멍을 남겨놓고 떠나갔다.”

자라나는 아이들을 껴안을 수 없는 부모의 고통과 슬픔. 그건 그가 정의의 사도이든 악당이든 더 크고 작고 따질 수 없는 차원의 문제다. 하물며 무고한 민간인의 경우라면.

그렇다면 이 수치는 어떤가? 지난 2월 발표된 런던 킹스칼리지의 조사를 보면, 이라크에서 2003년 3월20일부터 2008년 3월19일까지 죽은 9만2614명의 민간인 가운데 12%인 1만8522명은 미국 등 연합군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이라크군에 의한 죽음은 11%, 나머지는 파악되지 않는 종파갈등 등에 의한 것이었다. <허핑턴 포스트>는 이 중 어린이가 수천명에 달한다고 전한다.

지난달 리비아에서 숨진 종군기자 크리스 혼드로스는 2005년 이라크전에서 유명한 사진을 남겼다. 어둠 속 조명이 커다란 미군의 발과 총부리만 비추는 옆에, 빨간 꽃무늬 회색 원피스를 차려입은 꼬마아이가 손에 피를 묻힌 채 울고 있다. 6명의 아이가 탄 자동차 앞좌석에 있던 부모는 검문소에 차를 세우지 않았다는 이유로 미군의 총격을 받아 숨졌다.

전쟁은 갈수록 잔인해지고 무감각해진다. 2차대전 당시 직접 사람을 향해 총을 당긴 미국 보병의 비율은 15~20%였지만, 한국전쟁에선 55%, 베트남전에선 90%에 이른다는 통계도 있다. 2009년 아프간 파병 미군들이 ‘살인팀’을 만들어 재미로 민간인을 죽이고 기념사진까지 찍었던 사건 속의 희생자, 물라 알라 다드도 아이들이 있는 45살의 평범한 농부였다. 최근 <뉴욕 타임스>는 진행중인 이 사건 재판에 대한 심층취재 기사를 내보내며 “모든 전투병들 마음속의 야수”를 이야기했다. 피의자들의 심리를 조사한 전문가는 이 사건을 ‘반사회적’인 개인의 일탈로 보는 데 반박한다. 끝이 보이지 않고 적의 구분이 모호해진 아프간전의 특성이 이런 경향을 두드러지게 한다는 것이다.

빈라덴의 죽음으로 테러가 완전히 사라질 것이라는 기대만큼, 미국이 ‘도덕적 제국’으로 변할 수 있다는 기대는 순진한 이상주의다. 하지만 차악은 선택할 수 있다. ‘테러와의 전쟁’을 명분으로 대테러 전장에선 민간인 사살이 자위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기 일쑤이고, 서구에선 국가의 감시가 일상화되던 지난 10년간의 비정상적인 상태는 적어도 해소되어야 한다. 오는 7월 예정된 아프간 주둔 미군의 철수가 얼마나 더 빠르고 더 큰 규모로 이뤄질지는 그 첫 시험대다. 미국 국방부는 10만명 중 고작 2000명 규모를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미국 매사추세츠대학 잘랄 알람기르 교수는 자신들의 외교정책이 남긴 피의 흔적을 보려 하지 않고 그런 정책들이 야기한 결과를 받아들이지도 않는 미국을 두고 ‘이상한 제국의 기억상실’이라고 이름붙였다. 최근 몇년 동안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아시아의 어린이날을 기억하며 한국과 일본 등의 아이들을 향한 메시지를 발표해왔다. 그만큼의 관심은 아프간, 파키스탄 등 대테러 전쟁터의 아이들도 받을 권리가 있다. 김영희 국제부장 dor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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